2015년 9월 18일 금요일

한화의 사채볼, 상환 시간이 왔다

 김성근 한화 신임 감독은 취임식에서 '한 점을 지키는 야구, 끝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팀'을 만들 것을 천명했다. 그 말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였다. 극심한 타고투저 시즌 속에 한화는 많은 번트를 댔고, 퀵 후크를 했고, 당겨쓰는 운영을 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희생번트 갯수와 엽기적인 투수 소모는 최다 1점차 패배, 최다 역전패를 불러왔다.

  SK 시절도 그랬지만 나는 김성근 감독이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끝난 게임에 불펜 줄줄이 나올 때는 경기시간 늘어지니 짜증이 날 때도 있었지만, 경기 중엔 김성근 감독이 말하는 게 안 들리니까 오히려 가장 덜 불쾌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해 한화에서는 매경기 이 투수 땡기고 저 투수 올려쓰는 단기전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경기가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설상가상 400미터 달리기에서 마지막 직선주로에 왔다며 총력전을 선언한 9월 9일부터의 운영은 가히 고시엔 토너먼트를 연상케한다. 3일을 쉬고 나온 선발이 이틀 뒤에 또 나오고, 다음 날 선발투수가 오늘 불펜으로 나오고, 7-8-9이닝을 막게 하겠다는 투수가 2회부터 던진다.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본격 사채볼의 결과가 어땠을까?


 한화는 총력전 선언 이후 2승 6패를 기록하며 5위에서 8위까지 전력으로 추락하게 된다. 11경기 남은 지금 이렇게 시즌이 끝난다면 권혁(74경기 107.2이닝) 박정진(박정진 76경기 96이닝) 둘 모두 80경기+ 100이닝+ 페이스인데 비슷한 기록은 언제일지 궁금해 찾아봤다. 

 2009년 애틀란타의 피터 모이란과 마이크 곤잘레스가 각각 87경기 80경기에 출전했으나 합계 150이닝에 미치지 못했다. 2006년 피츠버그의 살로몬 토레스(삼성에서 뛰었던 그 먹튀 맞다)와 맷 캡스도 94게임 93.1이닝, 85경기 80.2이닝을 합작했다. 2004년에 샌프란시스코의 짐 브로워와 스캇 에어도 169경기 121이닝을 나눠 던졌으나 권혁-박정진 앞에서 나댈 상대는 아니고, 그나마 폴 콴트릴(86게임 95.1이닝)과 톰 고든(80경기 89.2이닝)의 양키스가 그나마 올해 한화에 두 점 놓고 비빌만은 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쭉 찾아본 결과 1987년 신시내티까지 가서야 김성근 감독의 맞수를 만날 수 있었다. 도박지왕 피트 로즈 감독은 롭 머피에게 87경기 100.2이닝, 프랭크 윌리엄스에게 85경기 105.2이닝을 맡겼다. 1979년 피츠버그의 척 태너 감독은 켄트 테컬비(94게임 134.1이닝)와 엔리케 로모(84게임 129.1이닝)를 저렇게 썼으니 한 수 위였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 이전엔 한 시즌에 80경기 이상을 던진 불펜 투수 두 명을 보유한 팀이 존재하지 않았다. 1871년부터 현재까지 MLB 기록을 다 뒤져봐도 김성근 감독보다 더 심하게 불펜을 굴린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162경기와 144경기라는 시즌 총 경기수를 보정하지 않아도 그렇다. 

 위 리스트에 오른 투수들의 운명은 대개 좋지 않게 흘렀다. 당시 22세였던 맷 캡스는 서른이 되기 전에 은퇴했다. 짐 브로워는 이듬해부터 곧바로 내리막을 탔고, 스캇 에어는 저 중에 적게 던진 편이라 그런지 3년을 더 활약하고 5년 뒤엔 볼 수 없었다. 엔리케 로모는 3년, 프랭크 윌리엄스는 2년, 콴트릴은 1년 후에 은퇴했다. 

 다행히 모든 이가 멸망하지는 않았다. 켄트 테컬비는 그 해 32세였지만 10년을 더 뛰었다. 톰 고든은 이듬해에도 잘했고, 마무리 투수 자리를 원해 필라델피아로 간 2006년엔 올스타에 올랐다. 그 후에 내리막이 오긴 했지만 40세 투수의 숙명이었다. 살로몬 토레스가 은퇴한 건 가족과 종교 때문이었다. 롭 머피는 2년 후에도 불펜 100이닝을 소화했다. 그 이후 6년 동안 60이닝을 넘긴 것은 단 한 번 뿐이지만. 

그렇다면 저렇게 불펜투수를 혹사시킨 팀의 성적은 어땠을지도 같이 살펴보자. 

 1979년 피츠버그 : 98승 64패, 지구 우승, WS 우승
 1987년 신시내티 : 84승 78패, 지구 2위
 2004년 양키스    : 101승 61패, 지구 우승, ALCS 패배
 2004년 자이언츠 : 91승 71패, 지구 2위
 2006년 피츠버그 : 67승 95패, 지구 꼴찌
 2009년 애틀란타 : 86승 76패 ,지구 3위

 5할 승률 아래를 기록한 팀은 2006년 짐 트레이시 감독이 이끈 피츠버그 뿐이다.  플래툰 신봉과 인상깊은 하관으로 유명한 이 감독은 나중에 콜로라도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받은 적도 있지만 98패로 팀 최다패를 갱신하기도 했다. 감독을 맡은 11시즌 동안 90패를 네번(다저스-콜로라도-피츠버그에서 모두 90패 기록)이나 했고 단 한번도 디비전시리즈를 뚫어본 적이 없다. 암흑기를 맞았던 팀들만 돌아다녔으니 무능하다고만 말하긴 어렵지만 좋은 감독이라기도 어렵다. 

 2015년 한화에서 권혁-박정진만 구른 것은 아니다. kbreport.com 기록실에 따르면 한화는 치룬 133경기에서 선발 611.1이닝(9위), 불펜이 572.1이닝(1위)을 던지는 기형적인 운영을 했다. 2013년 김응용 감독 시절에도 한화의 선발진은 리그에서 가장 적은 이닝을 던지고, 불펜은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긴 했지만 128경기 609.1이닝, 519.2이닝으로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2014년에도 리그 최악의 투수진이었던 건 똑같지만 선발 621.1이닝, 구원 507.2이닝으로 배분은 소폭이나마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2015년 시작 전엔 선발 자원으로 배영수, 송은범을 영입하지 않았나. 

 송은범은 주자가 있을 때 올리면 안좋았다는 것 외에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 수 없는 투수지만 배영수의 사용법은 팬들도 알고 있다. 꾸역꾸역 이닝을 먹어줄 수 있는 5선발이다. 장타를 많이 맞지만 볼넷을 적게 주고 삼진을 많이 잡는다. 마운드 위에 올려놓으면 아무튼 경기를 끌고 갈 수 있다. 종종 불펜 알바를 하긴 했지만 그럴 땐 롱맨보단 짧게 던지는 역할을 더 많이 했고 전형적인 선발투수다. 김성근 감독은 배영수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다. 비오면 로테이션 거르고 맞으면 그냥 내려버렸다. 여기서 김성근과 선동열 두 감독의 퀵후크 방식이 다른게 잘 보인다. 선동열 감독은 어지간하면 5회는 채우고 내려보냈다. 이닝을 먹어줄 수 있는 게 장점인 투수를 그렇게 써버리니 그냥 답이 없는 FA 실패작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선발로 영입한 배영수, 송은범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릴 경기를 버리지 못하면서 불펜에서 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화는 불펜들 팔로 백골탑을 쌓는 운영을 하면서 62승 71패로 8위에 쳐져있다. 5위 롯데부터 8위 한화까지 1.5게임차로 혼전을 펼치고 있다고 하나 삼성, NC와의 잔여 경기가 많아 별로 유리한 일정으로 보이진 않는다.  


  SK 1121 시절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어땠는지 돌이켜보았다. '볼넷을 감수하고 삼진을 많이 잡았다' '투수 교체가 빠르고 수비력이 좋아 장타를 잘 허용하지 않았다' '한 베이스 더 가는 뉴메타 고급 야구를 했다' 따위가 먼저 생각났다. 하지만 그건 단편에 불과하고 정확히 이야기하면 당시 SK는 그냥 다 잘하는 팀이었다. 일례로 2009년 SK는 팀홈런 1위, 2루타 2위, 탈삼진 1위, 팀도루 2위를 기록하며 팀득점, 실점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무시무시한 팀이었다. 저런 훌륭한 팀을 완성해 4년 동안 이끌면서 3번이나 우승한 것은 물론 김성근 감독의 공이다. 그러나 결코 '팀도 아니었다'고 할 정도로 하자있는 팀을 물려받아 '꼴찌를 일등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투수에 채병용, 윤길현, 김원형, 신승현, 이영욱, 정대현, 조웅천, 송은범, 정우람 야수에 정근우, 박재홍, 이진영, 김재현, 박경완, 최정, 박재상, 김강민, 조동화 정도는 이미 전임 감독이었던 조범현 감독의 마지막 시즌에 어느 정도 출장시간을 받고 있던 선수들이다. 여기에 군대에 있었던 박정권을 더하고 이듬해 팔려간 이대수를 빼면 대충 그 시절 SK 신구 멤버들이 갖춰진다. 더구나 그 시절에도 타선은 팀홈런 2위, 토털 베이스 3위를 합작하고 있었다.

 당장 2006년 SK 승률이 현재 한화보다 높은데, 저걸 한 사람을 끝도 없이 올려놓기 위해 천지개벽을 해서 1등이 된 팀으로 묘사하려다 보니까 김성근 감독을 다룬 책들을 지금 읽으면 솔방울로 수류탄 만드는 듯한 무리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가장 인상깊게 와닿은 구절을 소개한다.

설마 올해는 전권을 부여받아서..?

 저때나 지금이나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투수를 많이 쓰는 스타일인 건 변함이 없다. 다만 활용할 수 있는 투수의 풀이 큰 차이가 났다. 2010년엔 채병용, 윤길현이 입대하고 전병두, 조웅천이 아프고 정대현이 퐁당퐁당해도 정우람을 핵심으로 엄정욱, 송은범, 고효준이 어떻게든 땜빵을 할 수 있었다. 가득염, 큰승호 등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다.  2008년 정우람이 86경기에 등판하긴 했지만 77.2이닝만을 소화했다. 저것도 적지는 않은데 동 시대에 김경문 감독이 이재우, 임태훈, 고창성 돌린 거나 조범현 감독이 손영민 90이닝 던지게 한 것 때문에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이 위에 써놓은 선수들 중엔 베테랑들이 많아서 2008년~11년 드래프티들은 없다. 전병두 정도를 제외하면 조범현 감독 시절부터 있던 선수들이다. 물론 저들을 개화시켜 써먹은 건 감독의 역할이고 SK 드래프트엔 감독이 관여하지 않았다지만 원래 불펜으로도 못 쓸 선수를 감독이 그렇게 만든 거라면 왜 임기 중 뽑힌 투수들은 경기에 나오질 못했나? 김성근 감독은 야구의 신과 훌륭한 감독 그 사이 어딘가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전지전능한 초인인 적은 없었다.

 한화의 5886899 잔혹사를 돌아보면 정우람은 그나마 80이닝에서 끊어주던 감독이 권혁-박정진에겐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보인다. 3명의 전임 감독이 김성근 감독 부임 전에 이미 불펜을 잔뜩 소진시켰기 때문이다. 만약 마정길, 윤규진이 전임 감독들 아래서 소모되지 않고 유창식, 양훈을 팔지 않았다면 올해 김성근 감독의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성적을 위한다고 다음 시즌을 기약하지 않는 운영이 펼쳐졌다. 권혁-박정진-윤규진 중 윤규진이 먼저 사라지자 둘만 남게 되었다. 삐에로 인형이 나타나서 '또 둘만 남았네' 하는 것 같다.

 126경기를 팬과 함께 달리던 시절과 달리 144경기를 단거리 뛰듯 달리는 동안 성적도 떨어져나가고 옹호하는 팬들도 같이 떨어져나갔다. 투수조에 비하면 양호하지만 스프링캠프부터 한여름 동안에도 야수진도 특타와 함께 했다. 휴식과 시스템을 강조하는 최근 메타와는 동떨어진 투혼의 야구였지만 성과는 별 다를 게 없었고 노선 수정도 없었다. 1만원짜리 팀에선 1만원짜리 야구를 하고 1천원짜리 팀에선 1천원짜리 야구를 해야한다던 지론은 사라졌다. 삼성의 시스템 야구, 넥센의 지풍볼, 2013년 포스트시즌에서 두산이 보여준 야수관리능력, NC의 세이버메트리션 고용 등 변화의 바람 속에서 노감독에게 보였던 건 하향평준화로 인한 30년 역사상 최악의 시즌 뿐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원더스도 706.2이닝 중 518이닝을 외국인 5명이 던졌었다
 한계 앞에서 오히려 정신력 강조만 이어졌다. 탈보트에겐 “계속되는 실패를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다”,  권혁에겐 "혹사가 아니야. 권혁이 성장하는 과정이지", 박정진에겐 "‘너, 몇 살이야?’라고 물었더니 마흔이래. 그래서 ‘그렇게 할 거면 야구 그만둬’ " 연일 실소 나오는 발언들이 기사화되었다. 계속되는 비판과 혹사 논란에 아예 멘붕이 왔는지 경기 직후 화가 나는 바람에 선발 로테이션을 잊어먹어서 3일 쉰 송창식을 선발 예고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다가 탄로나기도 했다. 그 전날 경기 중 해설위원부터가 다음날 선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위 스타플레이어들처럼 화려한 야구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 현역 시절에 대단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투수로서 팔을 혹사한 탓에 선수로 빛났던 시절도 짧았다." '꼴찌를 일등으로'에 써 있는 말이다. 왜 그 한계를 본인은 넘지 못했나?

 난 마무리 캠프에서 칠순노인 펑고 아래 선수들이 쓰러져 있는 사진들이 왜 유난스럽게 올라오고, 밥먹을 시간도 없다는 게 뭐가 자랑인지 그걸 보는 사람들은 왜 더 굴리라고 좋아하는지 잘 이해 못하겠다. 한여름 땡볕에 특타하고 펑고하고 하는 거 보면서도 '프로가 훈련이 힘들면 하지 말아야죠' 하는 거 보면 제 정신인가 싶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야구판만은 아니지만 그런 노오오력 리더쉽을 밀고 갈 거였으면 성적으로라도 증명했어야 한다. 지금 보면 9년전에 한기주-신용운 굴리던 서정환 감독은 4강은 갔으니까 야신 소리 들어야 할 판이다.

되는 팀은 모두 모습이 비슷할지 몰라도, 안되는 팀은 제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법
 오래 굶주린 사람은 고기를 바로 먹으면 탈이 나니 소금물과 묽은 죽부터 먼저 주라고 했다. 근 5년동안 4번이나 꼴찌를 한 한화 이글스가 기초체력부터 챙기는 점진적인 처방을 받을 여유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올해처럼 144경기를 부스터 빨고 달리는 사채볼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할 방법은 없다. 김성근 감독이 취임했을때 팬들은 당장의 성적보단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바랐을 것 같다. 후반기의 부진은 일시적인 모라토리움일까, 아니면 디폴트의 전조일까 당장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상환 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