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5일 금요일

20대 총선 후기, 그리고 자기 반성

 여권을 비토하는 입장에서 이번 선거는 최악의 구도였다. 야권은 서로 찢어져 반목하고 있었고,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싸움에 진보정당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선거구 조정 결과 비례 몫이 줄어든 것도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3당 구도로 정계가 재편되며 최대 격전지 수도권에서 야권이 양패구상하며 어부지리로 여당이 압승하리라는 예측이 많았고, 나도 거기 동의했다. 

 개판 5분전인 야권 내분에 청와대와 여당도 막장으로 화답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기 위해 당대표 김무성의 반발을 찍어누르고 친박 이한구를 공천위원장에 앉혔다. 선거 5주전인 3월 2주차에 여당의 지지율은 정점에 달했다. 북한 안보리 제재를 이끌어낸 대통령 개인의 국정수행 지지도도 부정에서 긍정으로 반등했으며 텃밭 TK의 지지율은 무려 69.9%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욕심이 너무 과했다. 분명 명분은 상향식 공천을 주장한 김무성 대표에게 있었음에도 친이계, 유승민계를 공천에서 배제하고 그 자리를 진박으로 채우려들며 공천 과정에서 계파갈등이 극에 달했다. 

 더민주의 공천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김종인 대표에게 막강한 권한이 쏠리며 사실상 전임 문재인 대표가 주장하던 시스템 공천은 폐기되었고, 그동안 당내 탱커 노릇을 하던 현역 의원들이 컷오프되고 특정계파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자격논란이 제기되었다. 문재인 전 대표가 긴급 등판하고 컷오프자들이 결과를 수용하며 당장의 불만은 막을 수 있었지만 비례대표 문제는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이렇게 양당이 나란히 삽질을 하며 3월 3주차에 지지율 하락 성적표를 받아들고, 반사이익를 얻은 것은 고사해가던 국민의당이었다. 

 여당에서는 TK 진박공천에 반발한 김무성 대표가 공천장에 도장을 찍는 걸 거부하고 지역구 PK로 내려가버렸으며, 그동안 더민주의 텃밭이었던 호남은 대안으로 나타난 국민의당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 수도권은 호남으로 내려간 안철수에 대한 지지를 거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삼당합당 이후 굳어져있던 지역간 대립 구도가 새로운 형태로 희한하게 개편되고 있었다. 

 나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의회정치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고 정치무관심층에 대한 어필에 천착하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새정치 민주연합을 탈당하기 직전까지는 일단 기다리고 믿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혁신전대는 당위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혁신위원장 제의를 거부하는 것은 보상보다 책임이 훨씬 큰 일을 굳이 받을 필요는 없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소리 높혀 혁신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탈당 후에 양당 구도를 깨자며 수도권이나 PK로 가는 게 아니라(TK는 갈 거라고 생각치도 않았다) 미리 합을 맞춰둔 호남 탈당파들 데리고 호남에 본진차리는게 새정치인가 싶었다. 

 국민의당 지지자들의 이야기들은 과정은 동의하는데 결론은 동의할 수 없었다. 예컨대 나는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훨씬 더 설득력있다고 생각하지만 논의가 식민지 지배 옹호로 흐르고 더 나아가 이승만 쉴드에까지 이르면 그런 부류와 더 이야기를 할 실익이 뭐가 있겠는가? 국민의당도 마찬가지다. 유권자에게 거대 양당을 벗어나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제공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정동영, 천정배, 김한길, 박지원을 데리고 호남에 베이스캠프를 차리는게 새로운 시도라고 믿는 건, 결론은 안철수 대표 하나를 믿고 그 사람들을 감수한다는건데 거기에 대한 내 평은 짤 한 장으로 대신하겠다.


 내 눈에는 단물이 빠지다 못해 이젠 쓴물이 나는 인사들로 보인다. 하나만 봐 보자. 천정배는 민주당에 있을땐 지역구 공천 15% 여성할당제를 관철하려 하는 등 분명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각 정당이 지역구에 여성을 공천한 숫자와 비율을 보면 새누리당 16명(6.5%), 더불어민주당 25명(10.6%), 국민의당 9명(5.2%), 정의당 6명(11.7%) 이런데 저기 무슨 변화가 있는가. 설마 천정배가 공천에 지분이 없어서 저랬겠나. 정당들은 정책뿐만이 아니라 공천 과정에서도 더 여성을 배려해야 하고 압박을 받아야 한다. 트위터에서만 죽창운동하는 분들 생각과는 다르게 지역구 여성 출마는 현재 지형에선 그 자체가 험지출마고 따라서 훨씬 조직빨 정당빨을 더.. 어휴 굳이 멍청이들 얘기할 필욘없지. 아무튼 물론 안철수 대표가 처음 만든 정당이니 사람 구하기 어렵고 그런 건 있었겠지만 오히려 전보다도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실망스러웠다.

 '한 손님이 식당에 갔습니다. 주인에게 뭐가 맛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옆집은 맛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여기는 뭘 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옆집은 재료가 나쁘니까 절대 가지 말라고 합니다. 손님은 나가버렸습니다' 이러던 손님이 옆집에서 주방장이랑 잔반들 가지고 나와서 새 식당을 한다는데, 잔반 재활용 가게는 구청 위생과에 신고를 해야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었겠는가? 

 안철수 개인의 확장성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새누리표 5% 가져오고 더민주 15% 가져오면 패시브로 35% 지지는 항상 가지고 있는 새누리당만 웃는 일일테니 모두가 망하는 길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한길, 천정배, 정동영 류의 지분 장사하는 사람들을 휘어잡고 별 잡음없이 공천을 잘 마무리한 것이 좀 신기하긴 했는데 이미 망한 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표가 선거 직전에 호남에 가서 정계은퇴까지 거론하며 지지를 호소한 것도, 그 동안 지지했던 사람들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함은 이해하지만 수도권 접전지역에 가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라고 느꼈다.

'남의 상품을 못 쓰게 해서 자신이 이기겠다고 하면 그것은 모두가 다 망하는 길'
2007년 경선에서 가카가 남긴 명언이다
 이쯤에서 각당의 20대 총선 예상과 밑밥을 정리해보면 먼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줄곧 180석 이상을 노리겠다고 하다 3월 공천파동 이후 150석으로 목표의석을 조정했고 산하 싱크탱크는 125석~130석 설도 제기했으나 지난 19대 총선에서도 블러핑을 친 전례가 있기에 종편조차 엄살로 치부했다고 한다.

 더민주 김종인 대표는 107석 미만이면 당을 떠나고 비례대표도 그만두겠다고 공언했으나, 확실한 의석은 70석 정도라고 밑밥을 깔았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최소 20석, 최대 40석을 예상하며 목표에 못 미칠 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두자릿수 의석을 목표했다.

 내 예상은 대략 165석/100석/20석/4석/나머지 이 정도였는데, 이것도 사실 별 자신은 없었다. 새누리 180석 대폭발만 아니라면 좋겠다 그 정도 마음가짐이었다고 해야 맞는 것 같다. 우리 지역구도 결과가 정해진 곳이라 별 의욕도 없었다. 투표소 열자마자 가서 투표를 하고 집에 와서 다시 잤다. 평소에 이 시간에 투표를 하면 노인층 사이에 껴서 하게 되는데, 이 날은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뭐 비도 오고 투표소 위치가 바뀌어서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의미를 둘 만한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종일 놀다가 오후 6시가 다 되어가길래 출구조사만 보고 끄려고 TV를 켰더니 이런 광경이 보인다.



  불편한 기분으로 편하게 내려놓았다. 곧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저걸 보면서 생긴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생각보다 잘 됐다 -> 안철수 대박이네 -> 수도권은?

 개표가 진행될수록 더더욱 신이 났다.

출처 네이버 선거섹션
  감히 정알못인 내가 갓철수-갓태규님을 의심하는 불경을 저질러 송구했다는 것을 자인한다. 국민의당은 실제로 온건 보수층에게 어필했다. 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비례대표에서 새누리당의 득표를 35% 아래로 끌어내리고 더민주보다도 많은 득표를 기록하며 비례대표 공천이 훌륭했다는 것과 지역구 결과는 유권자들의 전략적 투표 결과임을 증명했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안 대표임은 확실하다. 조직과 사람을 더 갖추고 차기 선거에 임한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호남 지역구에서의 지지층과 수도권 비례대표에서 국민의 당을 선택한 지지층의 성격이 상이한 것은 불안요소이고 이를 노린 당내 꾼들이 야권통합을 외치며 기어오르겠지만 안 대표의 일관된 입장을 보면, 정책적인 연대는 할지언정 앞으로도 당 대 당 차원에서 통합이나 후보단일화는 고려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소선거구제 폐지와 결선투표제 도입이 야권 입장에서 중요한 이유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길 바란다.

 전통적 지지 지역인 호남을 잃으며 벼랑에 몰린 더민주는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뒀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호남색이 빠진 역작용으로 꾸준히 추진해온 동진정책-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보면 수도권에서 PK 진출을 한 남진 구도가 되었지만-도 드디어 결실을 맺어 호남 없이도 원내 1당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선거 망하고 비대위원장 할 줄 알았던 문희상 의원이 졸지에 국회의장 후보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공은 문재인 전 대표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이번에 안철수가 확장성을 보여줬다면, 문재인은 결집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호남에서 문 전 대표가 정치생명을 걸고 읍소하였으나 지역구에서 국민의당이 약 47%, 더민주가 38% 정도를 득표하며 애매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은 부담이다. 그렇다고 수도권과 PK에서 대승을 거둔 제1당의 대선주자가 호남 부진을 이유로 은퇴한다? 이건 문 전 대표가 다시 호남을 방문해 선거용 무리수였음을 인정하고 깔끔히 사과한 후 용서를 구하는 걸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문재인과 투트랙으로 나서 경제민주화와 포용적 성장을 영업한 김종인 대표도 공신 목록 두번째에 이름을 올리겠지만 대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 큰 득을 보진 못할 것이다. 여러 계파가 난립한 17대 총선과 달리 탈당파가 국민의당으로 이미 갔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소이다.

너무 나갔다

 새누리당의 참패원인은 근왕파와 공화파가 대립한 공천 탓도 있으나 경제실책과 폭정에 소위 합리적 보수층이 대거 이탈한 결과이다. 경제민주화 폐기로 시작되는 친재벌 드라이브는 낙수 효과 뻥카가 드러난 후에도 지속되었고, 여야의 합의를 청와대가 뒤집는 건 예사에 비판세력을 탄압하는데 정치력을 너무도 많이 소모했다. 특히 선거를 앞에 두고 추진한 개성공단 폐쇄, 테러방지법 제정,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 등은 누가 봐도 이유로 든 합목적성보다 선거용 프로파간다로서의 의미가 큰 정책이었기에 온건 보수지지자들이 질려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명분없는 공천파동까지 더해진 것이 한심함의 정점을 찍었다. 야권분열의 꽃놀이패를 믿고 안이했다. 김무성을 필두로 오세훈, 김문수 같은 예비 대권주자들이 대거 체면을 구긴 것도 큰 부담이다. 뭐 야권지지자 입장에서야 새누리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개인 팬덤 말 듣고 계속 배신의 정치 응징하면 재밌긴 하겠지만, 질낮은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만약 청와대가 정치적 노림수로 깜짝 반등을 노린다면 남북정상회담 카드 정도가 있겠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적 감각으로 저거 만졌다가는 손목이 날아간다. 위안부 합의, 세월호 참사 때의 무능한 대처같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사람들 청와대에 초청해서 위로하고 노력하겠다는 액션만 취했어도 반대파들을 반정부세력으로 라벨링하는 정치혐오 전략이 훨씬 잘 먹혔을 것이다.

 정의당은 목표 의석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3당 체제 유탄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정도로 이야기하면 되겠다. 가는 데마다 다른 야권후보 잡아먹으면서 연전연패하던 노회찬이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는 것도 뭐 성과라고 둘 수 있겠다.

 내 선거 예상이 틀린 이유는 단순하다. 안철수의 확장성을 과소평가했던 것이 먼저고, 사람의 변화를 믿지 않고 콘크리트가 깨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 먼저 사람을 판단하는 선을 그어놓았다는 것을 느끼고 선악론과 국개론에 매몰된 것이 아니었나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는 타협과 설득을 바탕으로 하는게 마땅하다. 물론 어느 세력이나 대화가 불가능한 콘크리트는 있다. 그런 사람들과 시간낭비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나 또한 언제든 설득될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