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차라리 괴력난신을 논하라

 문자로 된 기록이 보편적이지 않은 시대에도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은원이 얽히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일의 해석엔 '도리'와 '목숨'이 보충적 효력을 가졌다. 모두가 시퍼런 칼을 든 권력자에게 대들어 억울하거나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복수를 해줄 수는 없으니 대신 넋이라도 달래주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야사나 설화를 짓는 것이 그런 방법 중 하나였다. 야사나 설화를 모아놓은 책을 보면 대개 한 페이지 걸러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한을 풀어달라고 나오고, 숙청을 마친 권력자가 병에 걸려 무슨 신령한 귀신의 힘을 빌어 고치는 것도 자주 나온다. 그런데 나라 팔아 호의호식한 자나 부모를 해친 자는 어떻게 죽었든간에 프레디나 제이슨이 되어 무덤파고 기어나오진 않았으니 그런 이야기들은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주인공을 선정했는지 알 만 하다.

 공자는 괴력난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지만 이런 교차검증따윈 불가능한 초자연적 이야기들도 글을 배운 식자가 적거나 모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전설화로 남거나 아예 무속의 영역으로 남았을텐데 분명 당대든 후대든 기록으로 편집해 남아있는 경우도 많고, 황희같은 사람은 숫제 뜻있는 선비가 산야에 있으면서 들은 바를 곁에서 기록한 거라고 야사의 정의까지 내리기도 했다. 반유교적 괴력난신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정보는 취약하지만 나름대로 충효론과 생명중시 사상에 충실한 저술이니 선비가 하면 안되는 일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씹선비라는 비하적 표현도 인터넷에 넘쳐나지만 자칭 선비 정신을 본받는다며 고문깨나 아는 걸 자랑으로 삼고, 품위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나 고문을 많이 아니 역사도 두루 아리라 여겨진다. 그런 정체 모를 품위 지키는 꿀먹은 병아리보단 명예를 지킬 줄 아는 거친 사람을 더 좋아한다만 물어나 보고 싶다. 신릉군은 숨어사는 모공, 설공을 초빙하기 위해 평민으로 가장해 저잣거리 술집에서 함께 어울렸고, 평원군은 그 모습을 부끄러워하다 자기 식객 반을 신릉군에게 빼앗겼다.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품위있어 보이는지가 중요한가, 방향의 옳음이 더 중요한가? 평생 봐온 것만 보고 사는 저런 작자들의 언행이란 졸렬하기 그지없다. 시비를 가리기 전에 이미 손 들어주는 방향은 정해져있으니 자기 옷이 더럽혀질라 한발 물러서 옛날 고사 한번 인용하고 양비론으로 몰아 '요즘 세태가 아쉽다'며 혀나 끌끌 차기 바쁘다. 뜻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라 소인이나 할 법한 일이다. 거악에는 매번 눈을 감고, 소악에는 매번 거품을 무는데 거악의 '붕당'이 아니라면 매번 그럴 이유가 있는가? 그 악함의 한결같음은 한겨울에도 푸른 석파정 천세송같다. 약자의 생존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선비라니 가당찮은 소리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대의민주주의와 낙동강오리알볼파크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단점은 시민의 의사와 대표자의 의사가 불일치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접근하면 NC와 창원의 신축구장 논란에서 시의회 측의 의견은 합리적이다. 인근에 시끄럽고 러시아워 제조기인 야구장이 들어서는 것보다 순효과만 있는 시청 청사가 들어오는 것을 선호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창원측 시의원이든 마산측 시의원이든 잘 반영하고 있고, 아예 시청 부지 선정에서 밀린 진해측 시의원들은 무작정 시청을 유치하려는 게 아니라 대신 야구장을 달라고 하니 지역균형개발의 측면에서도 일리가 있다. 시의회에서 이미 통과된, 신축 구장 건설을 약속한 협약안을 지킬 필요가 없다거나 NC소프트의 본사나 연구개발센터를 창원으로 옮겨오라는 등의 주장은 뭐 흔한 지방의회의 떼쓰기로 넘어갈만한 일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간과되고 있다. 이렇게 시의회에서 나름대로 대화와 타협을 거치는 건 좋은데 애초에 연간 수십만명이 이용하는 야구장은 지역균형개발의 대상이 아니다. 스포츠 팀을 균형개발의 입장에서 유치한다면 창원보다 강원도 갬블러스나 경기북부 부대찌개스를 만드는 게 먼저일테고 인구 50만 창원, 40만 마산을 거르고 20만도 안되는 진해 지역에 야구장을 지으려면 최소한 진해가 마산-창원 중간에 있는 식으로 접근성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굳이 혈세 몇천억을 들여 가든파이브랑 귀곡산장 파리날리기 마케팅 경쟁을 하거나 낙동강오리알볼파크 만들 거 아니면 진해에 갈 필요가 없다. 같은 돈 주고 이대호-김태균 대신 채태인을 쓸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애초에 부지 선정 위치타당성 작업에서 창원-마산에 비해 300점 만점에서 100점이나 낮은 낙제점을 받았던 부지이기도 하고, 협약 조건이었던 2016년 3월까지 구장 완공도 불가능한 곳인데 저렇게 되면 당장 NC는 KBO 예치금 100억을 날릴지도 모를(현실적으로는 저 안에 삽만 떠도 예치금을 돌려주긴 할 것 같지만) 판이니 김택진 구단주도 7일도에 데이 러쉬했다가 날린 내 심정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다른 문제도 있다. 신축구장 부지가 결정되어도 금나와라와라 뚝딱하고 구장이 지어질 리 없으니 NC는 리모델링한 마산 구장에서 당분간 경기를 치뤄야 한다. 그런데 창원시 측이 2014년까지 마산구장의 광고권을 연간 6500만원이라는 헐값에 넘기며 NC측의 광고 수입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NC측에서 광고권을 재매입하려고 했으나 연간 65억원 이상을 요구하는데 이어 설상가상 마산구장의 리모델링을 했던 기간만큼 계약도 연장해줘야 할 판이다. 야구장 광고 수입을 적게 15억원 선으로 잡아도 2년 동안 비는 수입만 30억이 넘는데 가뜩이나 쪼들리는 신생 구단 살림 바가지에 체하지 말라고 버들잎까지 띄워주는 격이다. 이쯤되면 계산은 하고 야구단을 유치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저런 문제들이 다 공론화되서 일사천리 해결되고 NC는 창원에 잘 자리잡아 장사하면 NC나 창원이나 KBO나 서로 좋겠지만 문제가 없는 부분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니 KBO에서 넣는 강한 압박이 이해가 된다. 자체 인구 100만의 창원보다는 못하겠지만 전주가 진해보다 못한 것도 아니고 전북이라는 대기 0순위 후보가 있으니 아쉬울 게 없다. 중간에 끼인 NC는 팬들 성화 신경쓰랴 양측 눈치보랴 좀 난감하겠다만 연고지 이전의 명분도 있겠다 KBO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주는게 나쁠 건 없다. 창원 측도 어차피 진해에밖에 구장 못 지어주겠다면 큰 돈써서 짓고도 두고두고 욕먹을거, 인연이 아니구나 하면서 놓아주는 게 답일수도 있다. 지역 상인들이 주장하던 NC 아구스(에쿠스와 어감이 비슷해 럭셔리하게 들린다고 했다) 대신 창원 아구스 야구단을 만들든지 말든지 그건 알아서 하면 된다. 시의원들 말로는 리모델링한 마산구장이 현 무등구장보다 좋다고 하는데, 무등구장 옆에 신축구장 올라가고 있는 건 그렇다쳐도 그리 좋은 구장이 있다면 야구 대신 짬뽕을 해도 무척 재미있는 지역 특화 스포츠가 될 것 같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컵밥과 영세식당

 어렸을 때 못사는 동네에 살았으니 영세하지 않은 식당이 없었고 어렵지 않은 노점상도 없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이라 세 식구가 살면서 7천원하던 치킨 한 마리를 시켜먹기 부담스러웠다. 반 마리를 시키면 배달을 안해주니 엄마랑 15분을 걸어 가지러 갔던 기억도 나는데 나중에 집이 닭집을 했을 때 어지간하면 반 마리도 배달해주던 건 그때와 무관하진 않은 것 같다.

 처음으로 내가 공권력과 노점상에 대해 인식하게 된 건 그 나이 즈음이었다. 엄마가 근처 주공아파트 상가로 장 보러다니는 걸 졸졸 따라다니는 길에, 한 아주머니랑 내 나이 또래나 되보이는 아들 둘이 작은 트럭을 타고 다니며 천원짜리 호두과자를 팔고 있었다. 종종 엄마를 졸랐고 가끔씩은 한 봉지를 들고 집에 왔다. 어느날은 호두과자를 봉지에 담는 중 놀랐던 일이 있었다. 순찰차가 저 멀리 보이자 세 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트럭의 안이 보이지 않게 호루를 다 내리고 운전석으로 가서 숨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경찰이 단속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로 동네를 돌며 순두부랑 오뎅을 팔던 사람이나 채소장사를 하던 트럭만 봐도 저 사람도 잡혀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경찰도 불법 유턴, 신호 위반 다 하던데 저 정도는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다반사겠지만 하얗게 질린 세 모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노점상의 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은 오랜 후의 일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학교 병원이 완공되었고, 자연스레 사람은 많아지고 가뜩이나 좁아터진 보도에 분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으니 사람들이 보도로 걷지 못하고 차도로 내려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옆 재래시장도 한참 재개발 삽을 뜨기 시작할 때라 온 동네가 아우성이었다. 전노련이니 전철연이니 하는 단체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달랐지만 옳고 그름은 없었다. 똑같이 도로 점유하고 불법 영업해도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한 사람 자리엔 단속반이 얼씬도 안한다는 이야기도 파다했다. 그렇다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노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믿는 힘이 있고 빽이 있었다. 그런 폭력적인 도움도 받지못한 사람들은 밀려난지 오래였다. 시각을 바꿔 영세상인 대 노점상의 구도로 본다면 비싼 임대료 다 내고 세금내는(소득 탈루야 다 할 것 같지만) 영세상인의 의견에 귀가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노량진 컵밥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철거건 뿐만 아니라 노점상에서 컵밥 파는 거에 대해 영세상인들이 항의해서 컵밥을 팔지 못하게 되었다고 시끄러웠을때도 그게 진실은 아니었다. 아침 먹으러 고시식당 들어가는 길 노점에서 매번 컵밥을 팔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맥도날드 앞에 무한정 노점이 들어서지 않는 것도 나름의 노점 질서가 있어서일텐데 그 질서를 인정해줘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1년의 유예기간까지 주었다고 하는데 최소 권리금이라도 걸리지 않았다면 어지간했으면 기실 다 나갔을 일이다. 안타까울지는 모르지만 그 불법적인 권리금을 세금으로 보전해줄수는 없지 않은가? 노점상을 무슨 브랜드화 해서 세금 내고 규정 지키며 장사하게 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사업자들을 선정할지도 문제고 그럼 그 사람들이 계약기간 끝나면 지금처럼 안하냐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반론이 다양할 수 밖에 없고 인근 자영업자들에겐 날벼락이 따로 없는 얘기다. 뭐 사육신 공원 쪽에 집단 노점을 만들어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황금상권에서 장사하다 멀리로 옮겨갈 것 같지도 않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맥도날드 안쪽 골목 노점상만 다 철거하고, 대로변 노점상은 아직 건드리지 않았다니 문제는 그런 형평성에 있다면 모를까, 이른바 역세권 보도에 버젓히 부스까지 만들어 장사하는 노점상들을 두고 생존권을 이유로 두둔하는 것은 침소봉대다. 물론 타협과 설득을 통해 더 나은 방안을 찾을 수도 있겠고 그 방안이 더 유의미할 순 있겠지만 모두를 위한 일은 아닌 것 같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의리론의 부질없음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 영웅본색의 간지나는 대사다. 저건 영화의 극적 요소일뿐이고 애초에 세상에 그 의리라는게 지켜지던 때는 어느 기록을 봐도 없는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도 약속을 안지켜서 영구임대 주택에서 강제퇴거당했고, 요순시대 정도면 각종 판타지 역사서 포함해도 상고시대인데 저기 나오는 요-순-우 임금도 서로 찬탈을 해놓고 순양이라 우겼다는 설은 기원전부터 있었으니 배신은 인류의 오래된 유산임이 확실하다.

 사람들이 어떨때 그 의리라는 걸 지키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황은 이득을 앞에 두었을 때다. 가끔 만화를 보면 베지터같이 강자와 싸우고 싶었다며 손오공 후려치는 놈들도 나오지만 차라리 손권처럼 멍청하고 졸렬해서 앞뒤 구분 못하고 칼 꽂는 놈들이 많으면 많지, 저런 케이스는 거의 없다. 과거에는 웃전의 이득을 빼앗는 과정은 찬탈이라 부르고, 획득한 이득을 어제의 동지와 나누기 싫어하는 상황은 숙청이라 불렀지만 동기 과정 결과가 모두 같으니 그냥 배신이 때와 장소에 따라 많은 이름을 가지는 것 뿐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배신은 암묵적 면죄부를 받기도 한다. '조직의 논리'가 개입됐을 때가 그 중 하나다.

 내가 본 운동 선수 중에 가장 의리 좋아했던 사람이 허재다. 여기서 의리는 물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라기보단 (그랬으면 음주운전은 하지도 않았겠지) 끈끈한 동료애에 기반한 연대의식에 가까울 것이지만 대학 진학할 때도 의리, 실업팀 입단할 때도 의리, 트레이드 시켜달라 할 때도 태업을 하는 게 아니라 할 건 다 하고 요구하겠다고 부러진 손등으로 준우승 챔결 MVP 받고 갔으니 팀에 대한 의리를 다하긴 했다. 방열 감독 항명사건은 뭐냐 반문할수도 있겠지만 허재의 입김보단 다른 이유가 더 커 보인다. 이충희 해설위원과 척을 진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고 김현준 코치 장례식 문제였다고 한다.

 그렇게 의리 좋아하던 허재가, 신선우 감독이 LG로 떠나 김재박 감독과 평행이론 쓰기 시작해 공석이 된 KCC 감독으로 부임해 한 일들은 그 좋아하던 의리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조성원이 무릎 부상을 이유로 조용히 은퇴해서 이-조-추가 해체된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사건의 경과는 1) FA로 서장훈, 임재현을 데려왔다 2) 연봉 랭킹이 낮은 임재현의 전 소속팀 SK에는 보상선수를 줄 필요가 없었으나 서장훈이 있던 삼성에는 보상선수를 줘야했다 3) 자동으로 이적생 서장훈, 임재현은 보호선수 3인에 들어가고 이상민과 추승균 중 한명을 묶을 수 있었다 4) 추승균을 보호하고 이상민은 바이바이 5) 삼성이 이상민 데려가긴 부담되니 차라리 1라운드 픽을 달라고 한 제안도 거절

 이상민이 나이탓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건 사실이었지만 팔순 노인네는 아니고 2,3년은 거뜬해보였고, 그야말로 현대-KCC 꼬인 족보의 적통을 잇는 상징이자 최고의 슈퍼스타 겸 미래의 감독을 짬시켜버렸으니 난리가 났다. 이상민의 위상도 위상이고 그 시절 초보 감독 허재가 작전타임 중에 이상민의 지도(?)를 받는 모습이 자주 중계되었고 드래프트 모교 사랑도 시작된 시점이라 흔히 있는 노장선수 팽이 아닌 팀내 파워게임 아니냐 시각도 있었다. 진위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일리있는 주장이다. 뒷 얘기로 허재가 한 기자와 가진 사석에서 이상민만 팬 많냐 나도 많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카더라도 들려왔는데 성격상 그럴싸해 보이지만 컨펌되지 않은 야사 수준으로 넘기자.

 이적해온 서장훈 입장에서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올 때는 대학선배 이상민과 오랜만에 함께 뛰며 선수생활 마무리하겠다고 왔는데,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가니 가뜩이나 답답한 와중에 이응사 막강화력이 자기한테도 튀어서 입단식도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삼성에 FA 이적을 했을때도 팀이 샐러리캡 맞춘다고 선배 우지원을 보냈으니 트라우마까진 아니더라도 멘붕될 법도 했다. 여차저차 시즌이 시작되고 KCC는 전년도 꼴찌에서 벗어나 플레이오프에 나가긴 했는데 하필 이상민의 삼성을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업셋을 당하니 이응사의 한도 조금은 풀렸나 싶었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상민을 보낸 대가로 지킨 픽으로 2008년 드래프트에서 하승진을 뽑게 되는데, 자연스레 서장훈과 하승진의 출전시간, 포제션 문제가 불거졌고 일관성있게도 나이 많은 서장훈이 전자랜드로 트레이드 되게 된다. 2:3 트레이드였지만 당시 서장훈을 보내고 강병현을 받는 형국이었고 전자랜드 최희암 감독은 아주 좋아서 어음(유망주 강병현)을 보내고 현금(서장훈)을 받는다고 했는데, 꼬인 사람들은 중대 선수는 중대 출신 감독에게 보내고 연대 선수는 연대 출신 감독이 받는다 그렇게 해석하기도 했다. 사족으로 KCC는 플레이오프에서 서장훈의 전자랜드, 이상민의 삼성을 연파하고 챔피언에 오르며 강팀으로 거듭났고 이후 전태풍까지 뽑으며 허재는 명장 소리는 못들을지라도 복장 소리는 항상 듣게 된다,

 두 말 할 거 없이 이상민과 서장훈을 내친 이유는 허재의 성격이 변해서가 아니라 조직 논리 때문이다. 과거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제는 적장인 전창진, 강동희 감독과도 가끔 일이 있을 뿐이지 잘 지내는 허재다. 토쟁이들 말이긴 해도 서로 가끔 덕 본다는 말도 나온다. 다만 이상민, 서장훈은 성적과 세대교체라는 조직의 명분이 있으니 내칠 수가 있었고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틀어진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허재가 그린 팀의 미래에 저 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이상민이 삼성에서 은퇴하면서 영구결번을 받고, 그토록 오래 함께했던 KCC측의 영구결번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은 걸로 마무리 되었다. 씁쓸하지만 비슷한 일들은 엄청나게 많다. 한번 미래 계획 구상에서 빠진 조직원에게 따스한 조직은 드물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내부 결속 측면에서라도 웃긴 일도 서슴치 않고 벌인다. 그런 일들은 종목을 불문한 만국 공통인가 한국이나 일본이나 야구계에서 방침에서 어긋난 선수들 대하는 태도는 둘다 똑같았다. 고작(?) 대리인을 데리고 오면 연봉을 깎겠다 일갈한 요미우리 회장보다도 오히려 한국쪽이 더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고위층이 선수협에 무슨 말을 했었고, 이후에는 어떻게 표리부동했는지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인게 한 말과 행동만 쭉 적어도 고인드립감이니 적지는 않겠다.

 한 팀은 선수협 파동 때도 의리를 지켰어요 그런 말도 있는데 그건 팀에서는 뻘짓 하려는 거 오너가 철회시킨 일회성 이벤트다. 불과 몇년후에 현금받고 다른 팀에 내준 선수 이사비 50만원 주기 싫어서 야구규약까지 어겨가며 땡깡 부리다 망신당하는가 하면, 사인 앤 트레이드로 필요한 선수는 받아도 다른 팀에 그렇게 보내지는 않으니 그게 의리를 지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권력이 없어 자금줄 눈치를 봐야하는 폐쇄된 조직이라면 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과잉충성이니 자정기능 상실이니 말이 나올지 몰라도 중간관리자들은 목이 달려있으니 안 그럴 방도가 없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조던, 코비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

 큰 나무가 있으면 주변 나무가 못 큰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통한다. 스포츠에서도 계왕신급 한 명이 뛰는 동안은 물론이고 은퇴한 뒤에도 현역들이 두고두고 계왕신과 비교되며 평가절하되는 걸 보면 짠할 때도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추억팔이들과 뉴비들의 대결로 흐르면, 대부분의 키보트 배틀이 그렇듯이 모두가 개똥밭에 뒹굴거나 빠(혹은 까)가 까(빠)를 만드는 식으로 끝나기 쉬우니 각자의 추억과 자료를 음미하려고 눈팅하다가는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마련이다. 만선이 된 떡밥 논쟁과 3유 핸드폰 정책은 타지 않는게 이롭다.


 조던-코비-르브론의 관계는 저 짤방 하나로 요약이 된다 (물론 르브론이 파이널 MVP 하나 추가하긴 했다). 사실 조던은 어떤 선수였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고, 코비는 오래도록 그 큰 산을 넘기는 커녕 그늘에서 나오기도 힘들었던 선수였다. 같이 쓰리핏을 이룩한 오닐이 마이애미 가서 웨이드 멍석 까는 동안에 코비의 레이커스는 무슨 고시엔도 아니고 플레이오프 1라운드 참가에 의의를 둬야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 3쿼터까지만 뛰고 62득점, 81득점 그런 기록들이야 코비의 다른 대기록들과 함께 길이 회자됐겠다만 서코비-동티맥은 코비의 압승인데 산왕-디트의 시대지 쟤네 시대는 아니었다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가솔을 업어와 2연패를 달성했고, 보스턴은 가넷-피어스-알렌이 모여 우승을 했으니 버드와 매직 이래로 다시 보스턴 - 레이커스의 구도가 이뤄지고 있었다. 백투백 우승의 주축은 당연히 손가락 인대가 파열되고도 투혼을 발휘한 코비였기에 안티들도 줄었다. 사실 코비도 그동안 그만큼 해줬으니 올타임 넘버투 슈팅가드라고 자칭해도 수긍할 만한데, 연차까지 감안하면 너무 까여온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일반인같으면 인생퇴갤하기 쉬운 누명을 쓴 적도 있지만 늘 성실히 농구에 임해왔다.    

 그러나 르브론 제임스가 저 이합집산의 유탄에 맞은 것은 사실이다. 클리블랜드도 팀 전력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너무 명확하다. 르브론이 입단하기 전 승률 .207 팀이었던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 뛰던 7시즌 동안엔 평균 승률 .608을 기록했다. 그리고 르브론이 나가자 다시 승률 .232 팀이 되었다. 르브론과 함께하며 올해의 감독상까지 받은 마이크 브라운은 레이커스 감독에 취임해 스티브 내쉬와 드와이트 하워드를 선물받고도 1승 4패로 시즌을 시작하며 4년 계약 중 1년 반만에 해임됐다. 그렇다고 디시즌쇼 같은 짓을 한 게 잊혀지진 않지만 사우스 비치로 재능을 가져간 것 자체는 -마이애미하니 생각나는데 사우스 비치가 에이로드의 재능도 데려가면 좋겠다- 필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이애미 빅3를 젊은 놈들이 우승반지 날로 먹으려한다며 삼당합당 급으로 까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르브론이 못해서 반지원정대 결성이 불발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오닐은 보스턴에 베테랑 미니멈 130만불 정도를 받고 뛰다 은퇴했는데, 그 전 시즌에 클리블랜드에서는 2100만불을 받았다. 우승이 아쉬운 마지막 퍼즐급 선수가 시장에 흘러넘치지도 않을 뿐더러 미니멈 받고 가려면 원맨팀 말고 다른 대도시 강팀들도 많을 뿐이다.

 또 시간이 지났다. 코비는 다섯번째 반지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달려왔으나 댈러스 사기꾼에 당하고 오클라호마 영건들에 치여 아직 반지는 추가하지 못했지만, 올시즌에 최연소 3만 득점을 달성했고 엉망인 팀성적에 가렸을 뿐이지 득점왕 레이스 선두를 달리고 있다. 르브론은 빅3 결성 재수 끝에 각성한 모습으로 돌아와 오클라호마를 이기고 첫번째 파이널 MVP와 세번째 MVP를 수상했고, 코비에 뒤이어 최연소 2만 득점도 돌파했다. 작년 파이널에서 리그 득점왕과 올림픽 우승 주역으로 성장한 듀란트가 르브론과 격돌하는 모습도 인상 깊고 의미심장했지만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코비와 르브론이 높은 곳에서 만나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둘이 국적이라도 다르면 베이징이랑 런던에서 강제 결승 정모라도 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 더 그렇다.

 어제는 마이애미 대 레이커스 경기가 있었다. 워낙 흥행돋는 대진이라 ESPN이 정성들여 프로모 영상도 만들었고, 코비의 장문 인터뷰도 인터넷을 통해 실었다. 경기 전에는 1) 레이커스 홈이고 2) 마이애미는 백투백 두번째 경기고 3) 하워드와 가솔이 다 돌아왔기에 레이커스가 살짝 우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중반까지는 코비만 못하는 레이커스와 르브론 웨이드만 잘하는 마이애미의 대결이었다. 그래도 점수 자체는 접전이라 4쿼터에 각성한 코비가 분전하고 이에 자극받은 알렌도 회춘하는 모습을 보여 재밌게 봤다. 평소에 KBL만 보다가 빅매치 있을 때만 NBA보니 선수들은 전국구급 아니면 잘 모르는데, 사실 어떤 종목이든간에 최고 애들 모여서 경기하면 보는 것도 참 재미있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쓸모less Friendly

 2013년을 맞이해 새로 블로그를 만든 이유는 그냥 낙서장이 필요해서였다. 이 구글 블로그는 어떻게 꾸미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것저것 만져보면 알기야 하겠다만 귀찮아서 그냥 쓰기로 했다. 오래전에 쓰던 포털 블로그를 다시 꾸밀 엄두도 안난다. 어차피 부귀영화 누리자고 끄적이는 것도 아니고 쓸모less Friendly라는 블로그 이름답게 대충 쓸 생각이다.

 어쩌다보니 포스팅이 모조리 전부 국내 프로스포츠 내 뻘짓과 관련되어 있는데, 규정에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대기업에 대해 맹목적 적개심을 가진 돈키호테라 저런 글을 쓴 건 아니고 다만 주옥같이 황당한 일들이라 나중에 할일없으면 개그콘서트 대신 보고 웃기나 하려고 정리해두었다. 좋은 기사를 쓰는 기자분들도 많지만 그런 분들은 사정이 있겠고 시간이나 지면도 제약이 있으니 이렇게 시시콜콜한 사실관계를 나열해 정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할일없는 내가 모아보았다. 가볍게 웃자고 시작한 글에 이것저것 주절주절 담으니 쓸데없이 장황해져 쓰는 나도 민망하다. 당사자들에게 직접 확인을 요청한 것도 아니니 일부분은 사실과 다를수도 있겠다.

 생각나는 과거의 사건이 있으면 가내수공업으로 기사를 검색해 여러 매체에서 교차 보도된 것 위주로 사실관계를 적었다. 소소한 사건은 평소에 들리는 블로그나 커뮤니티를 찾아보기도 했다. 되도록 출처를 병기하고 각주도 달고 싶었지만 패드로 대부분 쓰니 솔직히 타자치기도 힘들다. 앞으로는 '까는' 글 대신 '빠는' 글도 적고 싶은데 아직은 마땅치가 않다.

김승현과 오리온스의 전쟁 : 이면계약 전성시대

 1. 이면계약의 시작

 김승현이 FA 시장에 나온 05-06 시즌 직후는 아직 4대 가드로 이상민,신기성,주희정,김승현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였다. 이상민이 내려오고 주희정, 양동근이 치고 올라오는 형국이었다. 김승현은 강동희-이상민을 잇는 이른바 천재가드 6년 주기설의 적장자였고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선수였다. 농구화도 잘 팔았던 마지막 KBL선수가 아닐까 싶다. 별로 좋아하는 선수가 아니니 칭찬은 여기까지하고, 김승현을 노리는 팀은 친정팀 오리온스 빼고 대략 3팀 정도였는데, 삼성-동부-LG 정도였다. 18억 내외였던 샐러리캡을 피하기 위해서 스타 선수들에 대한 이면계약이 만연했던 지하경제 활성화 시대에(프로야구 외국인선수 제도랑 똑같다) 김승현이 오리온스와 연봉 4억3천만원에 5년 계약을 맺었을 때, 모두가 직감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구나.

 2. 먹튀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그리고 FA 계약을 맺은 06-07 시즌 첫해부터 김승현은 살짝 삐끗했다. 아시안게임 소집 전 허리를 삐끗해 부상을 입었고, 2주만에 또 같은 부위를 다쳤다. 자연스레 출장 경기가 줄었는데, 역대 최고의 외국인 스코어러 피트 마이클과 호흡을 맞추며 결장이 좀 있었다 정도지 스탯이 많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동안 팀에서든 국대서든 그만큼 굴렀으면 한시즌 부진이 큰 문제는 아니다. 이미 허리를 구부리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 했지만 6강 PO에서 발목에 테이핑을 하고 시리즈 수훈선수에 선정될 정도로 투혼을 발휘했다. 이어진 4강 PO에서 급기야 다른쪽 발목을 접질려 아웃된 게 컸다. 시즌이 끝나고 발표된 다음 시즌 연봉은 6억3천만원이었다.

 07-08 시즌엔 1라운드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전 시즌에도 4주 진단을 받았으나 이번에는 2개월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니 많이 악화된 셈이다. 다른 병원에서는 모두 수술을 받으라 했지만 유독 구단측이 소개시켜준 병원만은 재활로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단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면 시즌을 접어야 하니 이유는 알 만하다. 구단은 친절하게 종로 봉침 할아버지와 부산 야매 마사지사를 소개시켜줘 벌침을 300방씩이나 놔주는 배려를 베풀었다. 아마도 저 두 노인은 화타와 편작의 재림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단은 또 잡아놓은 수술 일정을 꼼꼼하게 대신 취소해주는 원스톱 서비스도 제공했다. 재활치료로 방향을 잡았다. 4라운드에 김승현이 돌아왔지만 팀은 이미 2라운드 전패를 곁들인 11연패를 기록한 뒤였다. 시즌이 끝나고도 수술은 받지 못했다. 연봉은 5억 5천만원으로 깎였다. 김승현이 재활을 불성실하게 한다는 말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08-09 시즌은 숫제 장르가 농구도 의료도 아닌 미스테리 추적 드라마로 바뀐다. 출장 경기는 예년보다 늘어났으나, 오리온스의 성적은 망한지 오래건만 구단은 다시 6억을 제시한다. 그런데 김승현은 신기하게도 구단 측에 7억2천만원을 요구하며 연봉조정 절차를 밟았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구단의 승리. 이 시점에서 김승현은 폭탄 하나를 투척하는데, 연봉 조정에 불복하며 KBL에 기존 이면계약서를 제출한 것이다. 사건이 보도되며 파장이 커지자 일단 김승현은 한발 물러나 이면계약서의 존재를 부인하고 연봉 6억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KBL은 김승현에 18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1천만원, 오리온스에 벌금 3천만원 징계를 내렸다가, 구단의 건의로 출장정지 징계를 반으로 줄인다.

 09-10 시즌이 열렸다. 김승현은 12월 경기 중 상대 선수에게 무릎이 깔려 큰 부상을 얻게 되는데, 똑같은 부상을 당한 삼성 이규섭은 8주를 쉬었건만 팀이 연패중이라며 3주도 안되서 조기 복귀를 하게 된다. 개인 성적도, 팀 성적도 엉망이 되었고 시즌이 끝난 후 반토막난 연봉 3억을 제시받았다. 김승현은 이에 불복했다. 2010년 9월에 이면계약 중 밀린 임금 12억을 달라며 법정 소송에 들어갔다. 연봉조정에 불복한 것이기에 KBL은 규정에 따라 즉각 임의탈퇴 처분을 내린다.

 3. 돈 줘 vs 배 째

 소송에 들어가며 양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김승현은 이면계약에서 보장받은 50여억원을 지급하라 주장했고, 오리온스는 그 계약은 전임 단장이 했고 KBL이 2008년 이면계약에 징계 규정을 강화했으니 지킬 필요가 없으며 김승현이 태업을 했다고 말했다. 양측의 주장과 관계없이 실상 쟁점은 두가지다. 첫째, 실제로 조건이 확정된 이면계약서가 존재하고 유효하느냐, 둘째 그렇다면 당사자 쌍방은 계약을 이행했느냐다. 이 두가지가 문제이지 구단과 계약을 한 마당에 단장이 바뀌었든, 식당 영양사가 바뀌었든 당사자간 효력에 지장은 없다. 오리온스의 주장대로 2008년에 이면계약을 근절하려고 했으면, 김승현에게 청산금을 지급하고 다시 규정에 맞게 계약을 하거나, 계약서상 금액을 모두 주고 방출을 했으면 그만인데 그런 모습은 없었다. 물론 김승현이 승소를 해도 KBL사무국에서 징계는 있겠지만, 어차피 구단과 법정싸움을 했으니 미운 털 박혀서 출전기회도 없을 판이니 그냥 선수생활을 접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거기다 SK가 주희정과 김승현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가 '주희정이 무슨 선수냐'며 거절당한 사실이 밝혀지고(뭐 겨우 KBL 통산 어시스트 1위밖에 못한 미미한 선수였나보다), 김승현을 원하던 다른 팀 감독에게 오리온스 단장이 '김승현을 데리고 있다가 죽이겠다' 말을 했다는 증언이 보도되며 분쟁은 사랑과 전쟁 급으로 진화했다.

 2011년 7월, 1심에서 오리온스가 밀린 임금 12억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다. 김승현의 선택은 12억을 받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포기하더라도 코트에 복귀하는 것이었다. 오리온스 측은 변호인단을 다시 꾸려 2심은 자신있다고 했지만, 김승현측 변호사가 종로 봉침 할아버지 정도 되면 가능한 이야기다. 더구나 오리온스는 그룹 오너가 300억대 비리 연루로 구속되어 재판받고 있는 판에, 그룹 법무팀이 저런 미미한(?) 소송에 신경쓸 수가 없으니 협상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대화가 재개되었다.

 4.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오리온스는 김승현에게 고소를 취하해 받을 12억과 그에 대한 이자 2억원을 모두 포기하고 KBL 샐러리캡 규정에 맞는 새 계약을 맺으면 선수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나, 승소한 12억원을 받으려면 복귀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새 계약 금액을 구체적으로 제안하진 않았다니 코트에 돌아오려면 10-11 시즌 전 제시한 3억원을 받고 14억원은 포기하라 그런 말이다. 말로는 양측이 서로 양보하자는데 김승현은 11억을 포기한다치고, 오리온스는 뭘 양보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협상은 계속됐다. 이유는 알수없지만 오리온스는 김승현에게 1심 변호사를 해임하라고 했다.(승소했으니 변호사에게 성공보수를 줘야하는데 정작 김승현은 소를 취하하고 협상을 하느라 구단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 김승현은 그대로 따랐다. 구단에 사과문을 쓰라고 했다. 돈 떼인 놈이 떼먹은 놈에게 사과문을 써서 보냈다. 이것도 김승현이 직접 쓴 사과문도 아니고, 오리온스가 김승현에게 사과문을 보내 도장을 찍으라고 한 다음 김승현이 쓴 사과문이라며 공개했다고 하는데 이쯤되면 이상하지도 않다. 처음에 김승현은 오리온스 복귀를 원했으나, 몸값도 계약기간도 맞지 않아 다시 양측은 조건없는 즉시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리온스가 조건을 바꿨다. 복귀 직후부터 잔여경기 절반 이상에 나와 10분 이상 뛰는 조건에 합의서를 작성하면 시즌이 끝나고 트레이드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김승현의 가치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니 가격을 올린 다음에 팔겠다는 말이다. 연봉 협상도 문제가 됐다. 김승현은 KBL 샐러리캡을 감안해 2억 5천만원을 요구했다. 그 정도 금액이면 다른 팀이 자기를 데려가는데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리온스가 6억여원을 준다고 했다. 다른 팀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다. 다 된 협상이 또 결렬되었다.  선수 죽이기인지, 보내기 아까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감정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 즉시 트레이드에 합의해놓고도 굳이 오리온스에서 경기를 뛰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일단 5경기만 뛰면 바로 트레이드 시켜줄 수도 있다고 기사를 내기도 했다. 다시 여론의 비판이 거세졌다. KBL 한선교 신임 총재도 개입했다.

 2011년 11월 24일, 총재의 중재 끝에 합의서가 완성됐다. 김승현은 소송을 취하하기로 했고, 오리온스는 김승현의 의사를 존중해 원하는 팀으로 트레이드 시키기로 했다. 한선교 총재는 책임지고 임의탈퇴를 철회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뒷끝이 작렬한다. 처음부터 김승현은 삼성에 가는 것을 원했다. 재활 시스템이 잘 되어있고, 가드가 부족해 출전시간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서대로라면 그냥 삼성에 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리온스는 LG-전자랜드-삼성 세 팀과 협상을 진행한다. 즉시전력감 선수가 필요하다는 현장의 요청이 있어서였다. 협상 끝에 오리온스는 LG와 구두계약을 맺었다. 김승현을 보내는 대신 LG 김현중과 현금을 받기로 하며 보도자료까지 교환했다. 김현중은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짐을 쌌다. 삼성으로 가기 원한 김승현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거세게 반발했다. 다시 오리온스는 일방적으로 LG와 계약을 취소하고, 삼성으로 김승현을 보내고 포워드 김동욱을 받는 트레이드에 도장을 찍었다.

 물을 먹은 LG는 크게 분노했다. 구두계약까지 해놓고 상도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LG는 KBL에 제소했고, 오리온스는 500만원의 제재금을 내야했다. 김승현이 갑자기 삼성행을 요구했다며 해명하고(갑자기가 아니라 꾸준히로 단어를 바꾸면 맞는 말이다), 재심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오리온스가 LG측에 사과를 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끝까지 코미디로 끝났다.

 1년을 쉬고 삼성에서 다시 선수생활을 시작한 김승현은 11-12 시즌에 30경기 넘게 출전했다. 몸이 덜 만들어져 수비가 문제였고, 재활을 병행하며 체력을 관리받느라 출전시간은 26분에 그쳤으나 경기당 7.2득점, 5.1어시스트를 할 정도로 감각은 살아있었다. 오리온스 시절 사제관계였던 이충희 해설위원이 아직 허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지만 삼성측은 이를 반박했다. 사실 문제가 된 것은 허리가 아니였다. 복귀 시즌을 마치고 12-13시즌을 대비해 9월 ABA 대회에 참가하던 중 목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병원 측은 발병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처음 아플 때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가 떠오른다. 당초엔 재활로 방향을 잡았으나, 10월에 방침을 바꿔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2013년 1월 현재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5. 총평

i. 각 구단에 이면계약이 만연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CF 등으로 연봉 보전을 해주던 때였다(모기업 광고로 허재랑 KCC선수단이 거북선 안에서 덩크슛하고 김주성이 프로미 아저씨라며 보험회사 직원으로 나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ii. 그런 와중에 김승현과 오리온스가 이면계약을 맺은 것 자체는 양 당사자 모두 잘한 일이 아니지만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iii. KBL이 이면계약을 모두 청산하고 정리금을 지불하면 이전의 이면계약은 문제 삼지 않겠다던 2008년, 오리온스는 정리금 지급 없이 이면계약만 파기하기로 혼자 다짐했다
iv. 구단 측의 주장대로 김승현이 재활을 불성실히 하며 태업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구단의 반대로 수술도 못 받고 뛴 것은 사실이며, 계약서상 보장된 연봉 중 최소 12억을 받지 못했다는 건 법정에서 가려진 일이다
v. 이후 오리온스의 행보는 역대급이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을즈음 오리온스는 연고지 야반도주, 국가대표 전임감독 헤드헌팅, 김승현 이면계약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며, 32연패와 3승 42패로 승률 0.067을 기록해 해외토픽에 오른 98-99시즌의 저력을 다시 한번 발휘하기도 했다. 오리온스는 김승현이 입단하기 전 시즌인 00-01 시즌에 승률 2할에 간신히 턱걸이한 막강 꼴찌팀이었다. 그러나 그가 입단한 01-02 시즌에 36승 18패로 압도적인 1위에 오른 이후로 6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고, 김승현이 쓰러진 07-08 시즌부터 PO는 커녕 8위가 최고 성적이다. 초코파이보다 가나파이나 오예스가 맛있는 이유가 있었나보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SK : 뜻밖의 해임

 지난 7일 SK 와이번즈 신영철 사장은 신년사(링크)에서 의례적인 덕담 대신 쓴소리를 선택했다. 내용인즉 구단이 느슨해져있고 정신상태 등 실망스러운 점이 많으며 팀이 위기에 빠져 있다는 위기조성, 정신무장 강조 발언이었다. 만약 팀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단에 필요가 없으니 조치를 하게끔 주위에서 알려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정초부터 수위가 좀 '쎄긴' 하지만 1-1-2-1위하던 팀이 백투백 준우승을 했으니 의례 할 법도 한 이야기다. 다만 어딘가 실소가 나오는 이유가 있다. 1-1-2-1 시즌이 끝나고서는, 어딘가 빈틈도 있어 보이고 막걸리 냄새나는 팀컬러를 추구하고 싶다던 2009년 11월 신영철 사장과 2013년 1월의 그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서다. 그때는 호강에 겨웠었는지, 아니면 허허실실 외유내강의 팀컬러를 추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 SK는 2011년 8월 잘나가던 김성근 감독을 해임하고, 이만수 감독대행체제를 선택했다.

 SK의 창단 이후 역사부터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99년 전북을 연고지로 하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모기업이 쫄딱 망하며 휘청이자, KBO는 이사회를 열어 해외자본도 프로야구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하고 쌍방울 매입 후보 기업을 물색한다. 맥주회사 밀러, 한솔그룹, SK그룹 등이 후보였고, SK가 인수가 아닌 창단 형식으로 팀을 꾸린다. 본래 서울이나 수원을 연고지로 원했으나, 마침 인천 연고팀이었던 현대가 수원으로 야반도주하며 인천에 입성했다. 2000년 창단팀이기에 각 구단에서 선수를 2명씩 드래프트 받을 수 있었다. 쌍방울 소속 선수들도 전원 웨이버 공시되서 자유계약 신분으로 SK 와이번스에 입단했고 강병철 감독이 초대 감독을 맡았다. 창단 초기 SK 와이번스는 LG와의 악연으로 유명했다. 2001년 민경삼 LG코치가 SK 프론트로 적을 옮겼고, 2002년 LG가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 이후엔 김성근 감독의 아들인 김정준, 노석기 전력분석원이 LG로 이직했다. 2003년에는 SK와 LG가 서로 구장에 카메라를 설치해 포수 사인을 훔치지 않았냐고 아웅다웅 다퉜고, 이듬해에 SK가 이상훈을 트레이드로 데려오고, 그 다음해엔 FA로 김재현을 영입하며 화룡정점을 찍었다. 한편 팀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조범현 감독이 부임한 2003년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 2005년엔 4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6년에 6위로 쳐지며 SK는 새 사령탑을 물색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바로 2002년 LG에서 11번째 해임을 당한 김성근 감독이다.

 김성근 감독과 김은식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SK와의 계약은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고 한다. 구단은 김감독에게 2군 감독 계약을 제시했다가, 다시 이만수 코치를 수석코치로 두는 조건으로 1군 감독직을 제시했다. 사장과 단장이 배석한 자리에서는 3년 계약을 제시했다가 이내 다시 2년 계약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전통놀이에 널뛰기가 있긴 하지만, 협상 기간이 아닌 명절에 했었어야 하지 않나는 아쉬움이 든다. 아무튼 김 감독은 SK를 맡기로 마음을 정했고, 아들인 김정준 팀장은 '아버지는 구단에 신세를 갚는 길은 이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회고한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조련이 펼쳐진다. 06 시즌이 끝난 팀에 도착하자마자 '(그때 내가 봤을땐) 이건 팀도 아니지 싶어요' 말하며 담금질을 시작했고, 2007년 첫시즌에 정규리그 1위를 기록한다.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팀은 두산 베어스. 비록 SK가 정규리그 1위라고 해도, 2위로 시즌을 마친 두산 베어스도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0으로 스윕하고 올라왔고, 무엇보다 정규시즌 상대 전적에서 SK는 두산에 8승 10패로 근소하게 밀리고 있었기에 팽팽한 승부가 예상지만 2패 후 내리 4연승을 거두며 SK가 우승했다. 다음 시즌인 2008년엔 전년보다 10승을 더하며 승률 0.659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거뒀다. 한국시리즈에서도 두산과 다시 만나 4승 1패로 백투백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이 끝난 후 김성근 감독과 신영철 사장은 자정까지 훈훈하게 술자리를 가지며 연봉 4억원선의 3년 재계약을 맺었다. 2007년 시즌 중반, 인터뷰에서 김 감독이 '구단에 세대교체를 이뤄주고 팀컬러를 바꾸러 부임했기에 재계약 이야기는 넌센스다' 할때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2007년에 이미 차기 감독 내정설 뉘앙스가 있었으나, 김성근 감독이 2회 우승을 거뒀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이제 SK 왕조가 열리는 시점이 왔다. 

 그러나 물밑의 상황까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백투백 우승 후 SK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2008년 윤길현 욕설 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짧게 요약하면 SK 관계자가 경기 이후 레이번이 9-0으로 지는 팀이 무관심 도루를 한 건 야구 에티켓에 어긋난 게 아니냐며 최경환에게 한마디 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니 사건은 1실점한 레이번이 무관심 도루로 실점했다고 징징거린 것을 알아들은 최경환이 레이번에게 항의했고, 1차 벤치클리어링이 시작됐다. 이후 SK 윤길현이 최경환에게 위협구를 던져 2차 벤치클리어링이 터졌고, 다시 삼진을 잡고 내려가는 와중에 욕설을 내뱉고 덕아웃에서 재연을 한 것이 카메라에 잡히며 전 인터넷은 폭발했다. 나중에 김성근 감독측이나 팬들은 3연전 내내 기아에게 빈볼을 맞아 선수단이 격해진 상태여서 보복구를 던졌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분명 레이번은 1실점 했다고 징징거렸지 보복구를 던진 것은 아니지만, 다른 SK 선수들은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의식을 가졌을수도 있을 법하다. 종합하자면 1차 벤치 클리어링(징징)과 2차 벤치 클리어링(보복)은 같은 날 같은 선수에게 일어났을 뿐이지 다른 동기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사실 윤길현이 제대로 최경환을 맞췄으면, 벤치 클리어링이 다시 벌어졌어도 니네가 맞췄으니 우리도 맞췄다 식으로 넘어갈 수 있을 일이었는데, 쌍욕과 재연으로 끝났으니 경기가 끝나고 어떻게 11년 선배에게 그럴 수 있냐며 대대적 폭격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잊혀졌던 SK 채병룡의 안경현 빈볼사건, 김동주 헤드락 사건, 김재걸 빈볼 사건 등이 재발굴되었다. 설상가상 김성근 감독이 사사구를 던지고 사과를 한 투수를 사과했다는 이유로 2군으로 보냈다 등 온갖 음해와 루머에 가까운 이야기가 퍼지며 온갖 짤방과 조롱이 재생산되었다. SK 프론트도 사과문을 거는 등 나름 대처를 하지만 사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한국야구사 처음으로 사장-단장-감독이 모두 사과를 하고 김성근 감독이 하루 결장을 하고 나서야 파문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2008년에 있었고, 김성근 감독 재계약은 이 시즌이 끝난 후 이뤄졌다. SK 구단은 분명 김성근 감독을 재신임한 것이다. 이해 신영철 사장이 한 강연회에서 '우승보다 관중 2배 증가가 더 좋다'고 말을 했지만, 스포테인먼트를 강조했다는 취지였기에 불거지진 않았다. 시즌 중 김성근 감독의 1000승을 기념하는 티셔츠도 제작되었고, 분위기는 드디어 야인 김성근이 재계약까지 했으니 용으로 승천할 자리를 잡았다는 쪽이었다.

 이듬해인 2009년에도 SK 채병룡의 공이 롯데 조성환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이번엔 구단 프론트가 사직구장으로 내려가는 선수단을 보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김 감독의 방까지 들어온 상황이었지만 신 사장은 KBO에도, 롯데에도 경비를 요청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프론트가 선수단을 보호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감독과 프론트간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만수 코치와의 사이도 벌어졌다. 2009시즌 전 스프링캠프 때 김 감독은 이 코치를 두고 야구를 보는 시야가 아직 좁고, 선수단 장악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했다. 실제로 이 코치와 몇몇 선임 선수들간 갈등이 있었을 때였다. 설상가상 이 코치가 사석에서 김감독의 야구관과 정반대인 자신의 야구관을 설명한 게 김 감독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차기 감독 내정설이 파다한 수석코치의 항명으로 들릴 수 있다. 여담이지만 김응룡 감독은 이런 경우에 정말 짤없이 내치는 스타일이었는데, 김성근 감독은 아직 그 선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SK의 2009 시즌은 준우승으로 끝났다. 2009년 11월 신영철 사장은 급기야 '성적보다는 이제 SK가 얄밉다는 이미지만은 벗고 싶다. 어딘가 빈틈도 있어 보이고 막걸리 냄새 나는 팀컬러를 추구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한다. 재계약 첫해부터 김 감독은 흔들리고 있었다. 

 2010년은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해였다. 김 감독은 이 코치를 2군 감독으로 보냈고, 두달 후 다시 1군 수석 코치로 복귀시켰으나 둘 사이는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넌 뒤였다.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으나 대접이 달라졌다. 2007년 우승 후에 SK 선수단은 가족을 동반해 괌으로 여행을 갔다. 08년 우승 때는 하와이에 갔다. 10년 우승 때는 상품권을 포상으로 받았다. 전지훈련이나 아픈 선수를 일본 병원으로 보내는 의료비용, 코치진의 규모 등에서도 전체적으로 말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사실 나는 당시 SK 지정 병원에서 치료도 받아본 적 있었고, 가족이 그곳에 입원한 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본 쪽이 노하우도 있겠고 굳이 비행기 태워 보낸 이유가 없진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김 감독과 프론트의 전쟁은 김 감독 대 이 수석코치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간다. 

 2011년은 김 감독의 3년 재계약이 만료되는 시즌이었다. 1월에 이 수석코치가 야구를 주제로 한 동화책을 출간한다. '사인볼과 나의 꼬마친구'라는 책인데, 이 코치가 김 감독에게 선물을 했지만 반응이 서늘했다. 책을 쓸 때 김 감독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동화책 쓰는 거야 무슨 큰일이 있겠냐만은 사소한 일이라도 감독이 알아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때 감독이 대응할 수 있다는 취지다. 이제 감독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이 코치를 2군 감독으로 보냈으나 내려간 이 코치가 다른 2군 코치 한명을 가정사 이유로 사전 보고 없이 하루 휴가를 줬던 것도 문제가 됐다. 시즌 중반까지 SK는 3위에 있던 와중, 김 감독과 SK의 재계약은 난항을 맺었다. 6월 즈음 그룹 차원에서 계약에 대한 방침이 정해졌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신 사장은 시즌 중에 재계약 조건을 협상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재계약 협상은 세차례나 미뤄졌고, 심지어 김 감독의 재계약을 협상하는데 이 코치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다시 이 코치가 과거에 삼성 복귀를 시도할 때를 생각해보자. 삼성은 이 코치가 무리한 대우를 원한다며 협상을 접었다. 이 때 이 코치와 삼성의 중개 창구였던 모 인사가 다른 구단과도 접촉했었고, 과거 또다른 구단으로부터 감독직을 제안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링크) 이를 종합해보면 애초에 수석 코치로 부임할 때부터 차기 감독으로 '사실상' 내정됐다고 봐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운명의 8월이 다가왔다.

 2011년 8월 16일, 감독실에 신영철 사장이 찾아온다. 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신 사장은 왜 이만수 코치를 2군에 보냈느냐고 언성을 높혔다고 한다. 단장에게 이야기한 일이라 반론하니, 통보였지 않냐고 고함을 치고 코치 인사권은 구단 것이라 주장했다. 코칭스탭 인사권은 구단에 있으니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래선 한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 사는 꼴이다. 이에 이튿날 김 감독은 올해까지만 선수단을 이끌겠으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을 가졌고, 18일 SK는 김성근 감독을 해임하며 이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임명한다. 팬들이 경기장에서 시위를 벌이고, 유니폼을 불태웠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SK는 경기당 2천만원의 인센티브를 걸며 이만수 대행 체제에 힘을 싣어줬고,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둔 이 대행은 시즌 후 당연히(?) 정식 감독으로 취임한다. 김성근 감독의 해임 이후 벌어진 일련의 팬 숙청작업이나 이 감독의 친정팀 팬 중 일부가 조직적으로 SK팬인냥 각 커뮤니티에 위장전입해 분란을 일으키는 등 여러 논란이 있긴 했는데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후에 SK측은 김성근 감독에게 거액의 전별금과 은퇴식 등을 제의한 모양이나 얼핏 생각해도 저런 부질없는 일이 세상에 또 있나 싶다.

 물론 양측의 입장에 다 일리가 있다. 재계약을 약속한 구단이 계속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코치의 양해까지 얻어야 한다고 하니 김성근 감독 입장에서야 당연히 팀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을 테다. 그러나 김 감독이 시즌 중임에도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했으니 또 팀 입장에선 '체면'상 사령탑을 끌고 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도 굳이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면 결론은 뻔하다. FA 영입 한 명 없이 1-1-2-1을 만든 감독에게 프론트는 예우를 다하지 않았다. 구단이 경비를 줄이고 싶을 순 있다. 김 감독이 외부 코치들을 많이 데려왔고, 아픈 선수들을 굳이 일본 병원에 보내니 돈 꽤나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몇십억하는 FA 영입도 없었고 오히려 이진영 같은 선수는 잡지도 못하는 와중에, 임기 내내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3번을 우승했으면 코치 인건비야 감내할 만하지 않나 싶다. SK는 김성근 감독 취임 전인 2006년엔 관중 33만에 2000원 객단가를 기록하다, 2010년에는 100만 관중에 객단가도 7000원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저만하면 관중도 돈도 많이 몰아준 것 같다. 프로야구단을 1년 운영하는데 대략 200억~300억 선이 든다고 하는데, 이 중 굳이 코치진을 축소해 운영비를 줄이겠다면 김 감독과 상의를 하든가, 재계약을 포기하든가 하는 게 맞는 일이다. 약속한 재계약 협상만 자꾸 미룬다고 운영비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우리는 지갑을 열어 투자를 하기 싫을 때는 부하들의 정신무장만 주구줄창 강조하는 윗사람을 더러 봐왔다. 정신무장, 참 좋은 이야기인데 책임과 보상이라는 더 합리적인 방법이 있다. 더구나 프로야구 선수들은 정년이 보장된 사람들도 아니고, 성과 나온대로 몸값 책정 받고, 필요가 없어지면 방출되는 프리랜서들이다. 얄미운 우승 구단을 추구하든, 막걸리 구단을 추구하든 그건 구단 운영의 부차적인 개념이지 성적을 내야 밥벌이를 하는 프로야구 선수의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다. '몸쪽 공을 못 던지는 투수 집에 가보면 냉장고에 김치밖에 없다'는 김성근 감독의 명언이 있지 않은가? 애초부터 과감하게 동료 타자의 몸쪽에 공을 꽂아넣을 수 있어야 연봉이 올라가는게 프로의 세계인데, 2년 연속 준우승이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거니와 과연 선수단의 정신상태 문제뿐일까 의심이 된다. 

2013년 1월 5일 토요일

선수협과 변절

 세상의 모든 발전이 올곧은 선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미란다 원칙은 아동 성폭행범으로부터 시작됐고, 문민정부는 박철언이 건넨 계약금 40억에서부터 준비됐다. 더구나 야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더 잘 때리고 훔치고 속이는 팀이 승리하는 스포츠다. 다만 그 팀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작은 사회이고, 팀과 팀이 모여 리그를 이루니 모든 사회가 그렇듯 필연적으로 서로간에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를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이 있기 마련이다.

 선수협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삼성이 최고 연봉자 양준혁을 해태로 트레이드하자 양준혁은 이에 불복하고, 자신이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한 신분으로 삼성에 입단한 것은 구단과의 밀약이었으며 복무 시절 뒷돈을 받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양준혁은 다시 1년 뒤에 트레이드 시켜주겠다는 밀약을 하고 해태에서 뛰다 LG로 건너간다. 이때 부당함을 느꼈던지 선수협 결성에 앞장섰고, 중간에도 여러 문제를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선수협이라는 조직의 탄생에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FA신분을 얻자 LG에 당시 FA최대액 두 배 가까이되는 36억을 냅다 부르고, 우선협상기간이 끝난 하루 뒤에 바로 친정팀 삼성과 총액 27억 선에 계약하며 날 불러주는 팀이 없었다 울부짖었는데 진위는 모를 이야기지만 하여튼 굴곡 많은 선수생활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현재 프로야구를 이루는 세 솥발은 KBO 사무국, 가입 구단, 선수협이다. (팬은 빼도록 하자)구단은 KBO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고, 구단과 선수는 근로기준법에 의한 고용관계가 아닌 통일 계약서에 의해 사업자와 사업자의 계약을 맺는다. 여기서 선수협과 KBO의 관계가 애매해진다. 분명 선수협은 선수들의 모임이니 KBO에 속해있는 것 같지만, 총회나 이사회엔 회원이 아니므로 참석할 수 없다. 가령 KBO는 에이전트 제도를 12년 가깝게 시행 보류 중인데, 사업자끼리의 대등한 계약을 하는데 아무리 구단이 회원이라도 KBO가 선수에게 에이전트를 끼고 계약하지 말라고 할 명분이 따로 없다. 징계 역시 마찬가지다. 선수가 잘못을 저지르면 소속 구단 외에 KBO가 상벌위원회를 소집해 출장정지 처분 등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이는 규약에 근거가 있지 않냐 할수도 있다만 예컨대 전경련 소속 기업과 계약한 자영업자가 뭔가 잘못을 했다고 전경련이 자영업자에 영업정지 혹은 사회봉사활동 처분을 내릴 순 없지 않은가? 뭔가가 톱니가 맞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선수협은 분명 프로야구에 참여하고 있긴 하나 당사자 주체성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의 최저 연봉은 30만 달러에서 48만 달러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관중수가 240여만명에서 700만명까지 상승한 KBO의 최저 연봉은 2000만원을 쭉 유지하다 2011년 400만원 인상되는데 그쳤다. 각종 인센티브에 1군 수당까지 있기야 하지만, 30대 기업 대졸 초봉 평균보다 1000만원 정도 적은 금액이다. 이 기간 동안 평균 연봉은 약 7000만원에서 9941만원까지 꾸준히 올랐고, 최고 연봉은 7억4천만원에서 15억원까지 올랐다. KBO가 대통령이 두 명 바뀌는 내내 양극화를 추구하고 재정지출 삭감을 결의한 것은 아니고, 물가상승률 정도는 가끔씩 보전해줬을 법도 하다만 선수협이 교섭대상이 아니기에 단체협약을 맺긴 커녕 전반적인 문제를 토의하러 테이블에 같이 앉을 기회도 적었기 때문이라 봐도 무방하다.

 '선수협 뒤에 배후가 있다''사회주의적 조직이다'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해론과 진통을 겪고 마침내 2001년 정식으로 선수협이 출범했으나, 창립 멤버들이 이제 투쟁을 끝내고 내외로 통합의 길을 가겠다는 취지로(역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간부직에서 물러나는 순간이 왔다. 즉시 어용 간부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창립 멤버들 나름의 성과는 있었던 것이 바로 이때 FA제도와 최저연봉 2000만원 등이 정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선수협에 내려온 어용 간부가 그이상 구단의 뜻을 거스를 일도 없고, 창립 멤버들이 줄줄이 보복당하는 것을 본 선수들도 회장을 맡을 의지가 없었기에 회장직을 공석에 두고 공동지도체제(이것도..)로 유지되던 선수협은 2006년 이종범을 회장으로 선출한다만.. 06 07시즌 시원하게 망한 이종범이 선수협에 신경쓰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이 시절 각팀 주장들이 자동으로 선수협 대표가 되는 시스템을, 각자 자기 팀의 선수협 대의원을 뽑는 방식으로 바뀌긴 했다. 숫제 구단이나 감독이 직접 주장을 임명하는 팀도 있으니 유신헌법식 국회의원 지명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었다 그 정도 의미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외의 활동은 외국인선수 쿼터 확대를 반대했고, 소극적으로 처우 개선을 요구한 것 정도일까.

 그러나 2007년말 손민한이 선수협 회장에 취임하고 강경노선을 취하며 폭풍이 불게 되는데, 지금에서야 이 시절 내부 비리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며 흑역사가 되고 있고, 현재 박재홍 회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똥 치우느라 고생도 하고 있지만 손민한 회장 시절 강경노선으로 얻어낸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선수들의 초상권 주체를 구단에서부터 선수협으로 옮겨와 게임회사 등과 계약하며 안정된 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대졸선수의 FA 자격 획득 연한을 줄였으며 09년 WBC 분배금과 관련해서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여세를 몰아 손민한은 선수협을 노동조합으로 만들어 정식 교섭단체로 인정받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퇴까지 불사하겠다며 선수협 창설을 주도한 양준혁이, 이번엔 아예 선수협 노조전환 투표에 삼성 선수단을 퇴장시키는 것을 주도한 것이다. 손민한 전 회장이 반대표라도 좋으니 찬반 투표엔 참석해달라고 설득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삼성에 다시 입단하며 절대 선수협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않겠나 예상할 수 있었지만 못내 찜찜했다. 비단 의사결정을 방해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전 선수협 창설 과정에서 구단의 편에 섰던 유지현과 김기태도 좋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기억하지 못했는지, 자기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양준혁도 한국야구사에 길이남을 금자탑을 세워놓고도 석연찮은 은퇴-은퇴식은 화려했지만-를 했고, 이후에도 코칭 스태프 제안은 받지 못했다. 과정을 돌이켜보면 마치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 끌려갔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극우인사로 전향한 것을 연상케하는데, 사실 이러한 형태의 변절이 일반적으로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형태의 변절도 있었다. 역시 선수협 창립 멤버인 M씨가 FA 거액 계약을 맺은뒤 연봉이 뛰자, 연봉의 1% 수준인 회비가 비싸다고 선수협을 탈퇴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게 선수협을 떠난 M씨는 은퇴하고서는 '은퇴선수협' 사무총장을 맡아 월급을 받기도 했다. 기가 막히다.

 사람은 많은 이유에서 변한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 대한 시혜적 동정보다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훨씬 강력한 연대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연대에 불안감을 느끼는 계층이 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교활한 방안이 있다. 소작인 위에 마름 세우듯, 저렇게 몇몇에 완장을 채워주고 정당성을 만들어줘 알아서 들쑤시고 단속하고 다니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저럴진대 어찌할까 싶을 때도 있다.

2013년 1월 3일 목요일

김효범과 SK나이츠의 잘못된 만남

 이 링크를 보면 김효범의 인터뷰 기사가 무슨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킨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 삭제된 서민교 기자와의 인터뷰가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올 시즌 SK에서의 김효범은 선수라기에 참담한 수준이었다. 20분 이상 뛴 경기도 없었고, 가비지 타임에 나와서도 공수 양면에서 연신 삽을 들었다. 특별한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락세일 나이도 아니다. 그러는 와중에 팀은 단독 1위를 달리고 있고, 고액연봉자인 자신은 바뀐 전술에 적응도 못하니 태업 소리가 나올만도 했다. 

 문경은 감독이 김효범을 프로-아마추어 최강전에 출전시켜 감을 찾게 하려고 했지만 대학생들에게도 맥을 못췄다. 길이 없어 보였다.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KCC로의 트레이드였다. SK는 KBL 최장신 센터 알렉산더와 김효범을 KCC로 보내는 대신, 올해 외국인선수 1순위 지명자 심스를 데려왔다. KCC로 이적한 첫 경기에서는 부진했지만 이후 두 경기 연속 20+점을 넣었다. 이적하기 전 17경기에서 기록한 평균 2.2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SK와 김효범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던 것일까.


 1.  SK 입단과정

 1) 우선협상기간

  시작부터 이상한 FA 시장이었다. 09-10 시즌이 끝나고 모비스에서 2억 1200만원을 받고 뛰던 김효범은 FA 자격을 획득했다. 김승현 - 오리온스 이면계약 파문이 아직 남아있는 시장에서, 소속팀 우선 협상 기간에 모비스는 김효범에게 3억 8천만원을 제시했고 김효범은 4억 8천만원을 요구하며 시장에 나왔다.

 같은 기간에 SK는 소속팀 주희정, 방성윤, 박성운과 우선협상을 가졌다. 주희정은 4억5천+인센티브 5천에 SK와 도장을 찍었고, 방성윤, 박성운에겐 각각 5억 2천, 9천만원을 제시했으나 두 선수는 5억 7천, 1억을 요구하며 시장에 나왔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방성윤이 샐러리캡 1인당 상한선인 5억 7천만원을 요구한 것인데, 기량 자체야 부동의 국가대표지만 매년 부상이 있었던 선수기에 5억 2천만원도 후하다는 평이 지배적인 가운데, 과연 어떤 팀이 그 이상의 금액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 영입의향서 제출기간

 원소속팀과의 계약이 결렬된 선수가, 타 팀과 계약하려면 무조건 KBL을 통해 영입의향서를 받아야 한다. 가령 김효범을 영입하려는 팀들은 반드시 모비스가 제시한 3억 8천만원 이상을 제출해야 하고, 이 중 가장 높은 금액을 쓴 팀이 무조건 김효범을 낙찰받게 된다. 뒷돈이 들어간 이면계약을 막기 위한 방식인데 선수의 팀 선택권을 박탈하는 병맛 쩌는 규정이지만 아무튼 다시 상황으로 돌아가보면, 놀랍게도 SK가 무려 5억 1300만원을 제시하며 김효범을 낙찰받는다. 주희정, 김효범 둘에게 들어가는 돈만 샐러리캡 절반을 넘으니 자연스럽게 다른 선수와는 계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방성윤은 영입의향서를 받지 못한다.

 3) 방성윤의 사인 앤 트레이드?

 방성윤은 FA 미아가 되었다. SK가 샐러리캡 한도에 다다랐으니 기존 제안액대로 계약할 수도 없고, 타팀의 제안도 받지 못했다. 사실상 방성윤은 적당한 금액에 우선 SK와 계약하고, i. 김효범에 대한 보상선수로 모비스로 가거나 ii. 다른 팀과 트레이드가 되거나 iii. 연봉을 대폭 삭감해 팀에 남는 세가지 경우의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세번째 일이 일어났다. 
 5억 7천만원을 요구하던 방성윤은 1억 3천만원이라는 염가(?)에 원소속팀 SK에 남는다.
 새로 부임한 SK 신선우 감독이 규정을 이용해 사실상 뒷돈이 들어간 꼼수를 부린 게 아니냐는 설이 무럭무럭 퍼졌다. 개운치 않은 FA시장이었다.


 2. SK 입단 후 

 주희정-김효범-방성윤-김민수-외국인 선수. 화려한 라인업이지만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에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매년 그랬듯 방성윤은 아팠고 김민수는 골밑에 들어가지 않았다. 주희정이 공을 잡고 속공을 시작해도 공을 받아줄 동료는 저 뒤에 떨어져 있었다. 더 나쁜 일은 매년 아팠지만, 그때마다 일어나던 방성윤이 다시 일어나지 않고 은퇴를 선택한 것이다. 
시즌이 끝나고 팀은 7위에 머물렀다. 김효범은 모비스에서보다 더 많은 롤을 부여받고 더 훌륭한 스탯을 찍었지만, 연봉 협상에서 1억 5천이나 깍였다. -KBL은 FA계약을 해도 첫해를 제외하면 매년 연봉 협상을 다시 하는 기괴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팀 성적 부진이었고, 실상 김효범이 수비에서 구멍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김효범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법도 했다. 기사에 따르면 SK의 10-11시즌 팀 공헌도순위는 1위 래더, 2위 주희정, 3위가 김효범이었다. 할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같은 고액 연봉자 주희정은 연봉이 동결되었으니 억울할 법도 하다.

 SK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i. 첫해 연봉은 FA프리미엄이다 ii. 팀 공헌도가 팀내 3번째인 것은 맞지만 연봉에 걸맞는 활약이 아니었다 iii. 주희정의 연봉을 삭감하지 않은 이유는, 09-10 시즌에 샐러리캡 제한으로 연봉 손해를 본 것을 보전해준 것이다.

 양측의 의견을 모두 종합해보아도 김효범 측 의견에도 일리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의욕을 잃은 김효범은 11-12 시즌 공격에선 신나게 난사를 했고, 수비에선상대 3번을 아주 날뛰게 해주며 SK의 9위 등극 1등 공신이 되었고, 김선형의 등장으로 팀내 롤도 크게 줄며 또 연봉이 깎였다. 이번엔 노쇠화가 시작된 주희정도 사이좋게 연봉을 폭풍삭감 당했다. 이때 연봉협상 과정에서 F욕을 내뱉었다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뭐 그건 어차피 귀화한다 약속하며 KBL 와놓고 군대 못 가겠다고 안지키는 검은머리 외국인 마인드니 자기 동네 추임새 나왔다고 넘어가고..

 3. 大亡의 12-13 시즌

 SK의 팀 전술이 크게 바뀌었다. 2번을 보던 김선형을 주전 포인트 가드로 돌리고, 자연스레 주희정이 백업 가드가 되었다. 동시에 최부경의 입단과 박상오의 FA  영입으로 포워드진이 두터워짐에 따라, 문경은 감독은 전통적인 2가드 2포워드 1센터 대신 4포워드 (정확히 말하면 김민수-최부경을 2빅맨으로 세우고 헤인즈가 앞선에 서서 상대 가드부터 골밑까지 압박하는 방식) 체제를 선택했다. 헤인즈가 센터 롤을 소화하지 않으므로 수비 전술도 대인 방어가 아닌 3-2 드롭존을 중심으로 한 지역 방어가 되었다. 헤인즈의 체력 방전이 우려되긴 하지만 빠른 팀이 되었다. 높이를 앞세운 전술이나 드랍존 수비의 특성상 상대 포인트가드의 3점이 좋거나, 코너로 패스를 잘 빼주면 반드시 오픈찬스가 나기 마련이라 양궁농구에 약하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있었으나, 상대 센터에 공이 가면 헤인즈 - 최부경 - 김민수가 달려들어 생각보다 잘 막았고, 다른 팀 슈터들은 오픈 외곽슛도 생각보다 잘 넣지 못했다. 가령 27일 인삼 이정현은 SK 상대로 3점 11개를 던지고도 하나도 못 넣기도 했다. 

 그 와중에 김효범은 계륵이 되었다. 김선형-박상오-김민수-최부경-헤인즈의 주전이 막강한 가운데 리딩이 안되니 주희정 대신 백업 포인트가드를 맡길 수도 없고, 상대 포워드 수비가 안되니 김동우의 벤치 롤을 소화할 수도 없고, 종종 2가드를 돌릴 때도 권용웅 변기훈과 경쟁해야 하는데 오픈찬스에서도 슛이 안들어가니 도무지 스팟슈터로도 써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종 가비지 타임에 들어가도 상대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되는 수준이었고, 폼을 끌어올리라고 프로 아마 최강전에 출전시켰으나 2라운드 탈락에 대학생들에게도 말리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당초 문경은 감독은 시즌을 길게 보고 김효범을 트레이드 시키는 대신에, 컨디션이 완전히 올라온 후 롤을 맡길 구상이었으나, 마침 이한권이 부상당해 그렇잖아도 선수없는 KCC 허재 감독이 적극적으로 트레이드 요청을 해와 KCC로 보내게 된다.  첫경기 KT 전에서 신나게 난사를 하며 3득점에 그친 김효범은, 이후 오리온스 전에서 23득점 LG 전에서 26득점으로 완전히 살아난 모습을 보였다.

4. 총평 

 부진의 원인을 위에서도 썼지만, 간략히 정리해보면 1) FA계약 자체가 기량에 비해 심하게 오버페이였고 2) 당연히 돈값은 하지 못했으며 3) 연봉마저 계속 깎이니 의욕 잃고 어차피 자리도 없겠다 본격 먹튀될 걸 선수 급했던 허재 감독이 살렸다 정도일텐데, KCC야 김효범 마음 편하게 뛰기엔 좋은 환경이니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다만 분명 문제의 원인 중 부수적인 것엔 다년 계약을 불허하고, 선수의 팀 선택권을 완전 박탈하는 현행 FA제도에도 있다고 본다. (김효범 케이스는 팀 선택권이 박탈된 케이스는 아니겠지만) 이면 계약을 막으려는 여러 가지 제약 규정이 오히려 자유계약이라는 FA 제도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는 구단이 모기업에 종속된 한국 프로스포츠의 고질적인 병폐니 개선하기엔 요원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