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4일 수요일

암흑기에 대처하는 팬들의 자세

 학교 부근에서 자취를 하는 나는 매년 봄마다 주정뱅이가 되어 거리를 몸으로 빗자루질하며 친구들에게 끌려가는 애들을 많이 목격한다. 대개 그네들의 주정 패턴이라는 게 다 똑같다. '나는 xx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걔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혹은 '나는 짱짱맨인데 왜' 에서 벗어나는 꼬라지를 본 적이 없다. 암흑기를 맞은 스포츠 팬들의 징징거림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겪었던 암흑기 그딴 구구절절한 사연은 굳이 시시콜콜히 적지 않겠다. 암흑기가 오는데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에서 종말이 도둑같이 온다고 하듯, 속으로는 곯고 있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다가 어느 순간 훅 가는 케이스도 적지 않다. 2008년 한화 이글스나 2013년 기아 타이거즈는 아주 좋은 예이다. 이렇게 한번 뻥 터진 팀이 한해만 훅 가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암흑기가 시작된다. 한시즌 일부러 탱킹하고 이듬해 좋은 픽 받고 외국인 선수 잘 뽑으면 6강은 가는 농구가 아닌 이상 좁은 국내 스포츠 판에 단기간 리빌딩 개념은 가능성도 없고 의미도 없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삼성, SK 두 팀 중 최소 한 팀은 한국시리즈에 나갔는데 저 팀들이 탱킹을 통한 리빌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가. 근래 4강권 예측에서 빠진 적이 없었던 두산도 같은 경우다. 반대로 말하면 잘나가는 팀은 계속 잘나가고 못나가는 팀은 계속 못나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이야기인데, 얼핏 생각해도 팀 자체의 시스템이나 인프라 투자의 문제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팀의 암흑기를 재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십여년이 넘게 게시판을 눈팅한 결과 한가지 명료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팀이 아닌 다른 하위권 팀의 팬들의 글을 눈팅할 때 정확성을 담보받을 수 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위권 A팀팬 1 : 우리 팀에 지금 부족한 건 무엇일까요.
 " 2 : 무슨 포지션이 취약하니 FA나 트레이드로 甲이나 乙을 데려오면 좋겠습니다.
 " 3 : 甲을 데려오느니 차라리 丙,丁을 키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 
 " 4 : 乙은 그 돈 주고 데려오기에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차라리 아껴서 시설을 짓죠.

 팬 사이트에서 매우 일상적인 대화지만 우리는 저런 대화를 통해 투자가 없다고 가정했을시의 그 팀 미래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어차피 FA로 누굴 데려올 돈으로 다른 시설을 확충하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만약 당신이 甲을 데려오기 위한 팬들 나름대로의 트레이드 베잇에 오른 유망주나 키워보자는 유망주 이름을 들었을 때 듣도 보도 못한 친구들 이름이 가득하다면 앞으로도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프렌차이즈를 이끌고 나갈 진퉁들의 이름을 기억하는건 한순간의 임팩트면 충분하다. 애초에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언론에서 3대 투수, 4대 유격수 이런 식으로 패키지로라도 묶어 보도를 했을테니 기억하지 못할 확률도 적다. 따라서 우리는 타 팀의 암흑기가 지속될지 여부를 비교적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다. 마구마구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노말카드 3장 돌린다고 레어카드를 주진 않으니 트레이드 확률이 없을 것임도 자명하다. 물론 응원팀의 유망주는 당신이 이름을 기억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저 방법을 사용하기 부적합하다. 

 다시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자. 만약 응원하는 팀에 암흑기가 도래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루틴을 반복할 확률이 높다.

 1. 충격 & 부정과 고립의 단계





















 냉혹한 순위표와 저질스러운 팀스탯을 부정하고 일시적인 부진일 거라며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당신이 취해야 할 일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팀의 현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는 것이다. 어차피 같은 팀팬들끼리만 얘기해봐야 냉정한 진단을 하는 사람 이야기는 듣지도 않을텐데 병을 악화시키는 행위다.

 2. 분노의 단계













 계속되는 패배로 온갖 성질을 다 부리며 선수, 감독, 심판은 물론 타팀팬에게까지 패악질을 부리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는 단계이다. 어차피 밥먹으라는 엄마한테까지 짜증부리다 등짝스매싱을 당하지 않는 이상 무슨 합리적인 말을 들어도 백약이 무효하니 배설할 사이트를 찾는 것이 좋다. 물론 익명 사이트가 나을 것이다.

 3. 타협의 단계


 어차피 루징 시즌은 확정되었고 당신도 반쯤은 받아들였으나 괜히 쓰잘데기없이 내년도 픽을 예상해본다거나, 그 때 그 경기를 잡았더라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나아가 몇승 몇패를 하면 4강에 갈 수도 있을 거라는 식으로 누구와 하는건지도 모를 타협을 하는 시기이다. 사실 이 시기에 계산이랍시고 하는 짓 중 실익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장 이롭다. 

 4. 우울의 단계 
















 이미 시즌이 끝났다는걸 인지하고 과거의 '좋은 날들' 즉 빛나던 팀의 시기를 회고하며 추억담을 나누는 시기이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노인네들이 왜정 때가 좋았네 하는 것 같은데 막상 자기들은 무척이나 진지하다. 이 단계를 설명하는 관용어로 '94년 신바람 야구'가 있다. 

  5. 수용의 단계


 대개 다른 팀이나 종목으로 관심사를 돌리거나 생업에 집중하게 되지만 간혹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성불하지 못하는 지박령같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들과는 멀어지는 것이 좋다.


 한번 온 암흑기는 치과 치료처럼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이미 팀의 모든 여력이 소진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기약없는 기간 동안 팀과 함께 고난을 겪든, 그 기간 동안 잠깐 덕질을 쉬든 자유지만 멘탈은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순종 2년 이후로 한번도 우승을 못한 시카고 컵스같은 팀팬들도 있는데 징징거린다고 팀이 잘하는 것도 아니고 덕질에도 예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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