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7일 목요일

기억에 남는 견제구들

 팬의 관심을 먹고 자라는 프로스포츠는 필연적으로 미디어와 친해질 수 밖에 없다. 레너드 코페트가 '야구란 무엇인가'에 괜히 미디어에 대한 지면을 할애한 것은 아니다. 리그 전체의 흥망도 미디어가 좌우한다. 데이비드 스턴 NBA 커미셔너같은 사람도 미디어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반대로 미디어와의 관계를 중시해 데이비드 스턴이 NBA 커미셔너가 됐을수도 있다). 전국방송으로 중계되는 샌안토니오가 원정 6연전 마지막 경기였던 마이애미전에서 주전들을 아예 경기장에 데려오지 않았다고 25만달러 벌금을 먹였을 정도다. 자극적인 소재를 좋아하는 게 미디어의 본질이니만큼, 팀과 팀이건 개인과 개인이건 혹은 팀과 개인이든 갈등 구조도 매우 반긴다. 사실 중요한 순간의 신경전은 팬 입장에서도 재밌다. 서로 편을 가르는 원초적인 재미가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주먹다짐이나 욕설이 나오면 보기 불편하기도 하고, 가끔 무톰보같이 눈치없게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을 건드리다 웰컴 투 NBA 한마디와 함께 후세에 길이 남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재치있는 입담을 주고 받는 정도면 즐겁다. 최근 기억에 남는 '견제구'들을 몇 개 모아봤다.

 1. 추어탕이나 비빔밥이나 

 프로농구 08-09시즌 플레이오프 4강에서 모비스를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올라간 삼성 안준호 감독이 포문을 열었다. '비빔밥(전주 KCC)이든 추어탕(원주 동부)이든 (누가 올라오건) 삼성 선수들은 식욕이 왕성하다'며 자신감을 과시했다. 역시 대진표 건너편에서 4강 대결 중이던 동부 전창진 감독과 KCC 허재 감독은 각각  '요즘은 치악산 한우가 더 유명하다' '전주는 콩나물국밥이 더 맛있다'고 대응했다. 비록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KCC에 석패해 준우승에 머무른 안준호 감독이었지만, 추어탕-비빔밥의 여운은 오랫동안 남았고 안 감독이 꾸준하게 밀던 사자성어 시리즈는 금방 잊혀졌다. 솔직히 억지 사자성어 '무한도전'보다는 '니갱망'이나 '승리했을때 영웅이 나타나'가 더 와닿지 않는가?

 2. 이 나라는 Yankee Country지 Red Sox Nation이 아니다

 쿠바 출신 호세 콘트라레스가 보스턴의 더 나은 오퍼를 뒤로 한채 양키스 계약서에 사인했다. 다이아몬드를 사주고도 심순애를 뺏긴 김중배에 빙의된 보스턴 래리 루키노 사장은 뜬금없이 양키스를 악의 제국이라 비난했고 이것이 이후 감정싸움의 도화선이 되었다. 로켓-페팃-부머를 모두 떠나보낸후 투수력에서의 우위를 잃어가고 뻥타선으로 연명하던 양키스는 2004 ALCS 악몽같은 리버스 스윕을 시작으로 몇년을 헤매는 중이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양키스 구단주의 큰아들 행크 스타인브레너 부사장은 보스턴의 WS우승으로 2007 시즌이 끝나자 뉴욕타임즈의 인터뷰에서 거친 발언을 했다. "이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면 양키스 모자랑 재킷 입은 사람들은 많은데 보스턴 물품들은 볼수가 없다. 레드삭스 네이션(보스턴의 팬클럽 이름)그딴 개소리는 보스턴 구단과 ESPN이 지어낸 소리고 미국은 양키 컨트리지 레드삭스 네이션이 아니다. 우리는 양키스를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고 우주의 질서를 되찾을 것이다." 굉장히 격한 발언이었는데 보스턴의 존 헨리 구단주는 행크에게 레드삭스 네이션 회원권을 보내며 관심에 감사하다고 영리하게 응수했다. 조지 영감이 나이먹고 유해진 걸 슬퍼하던 양키스 팬들은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좋아했고 보스턴 팬들도 구단주가 똑똑하다며 즐거워하며 윈-윈으로 끝난 해프닝이었다.

 3. 모이어처럼 던져봐라

 사실 행크 스타인브레너의 엄한 소리는 보스턴 디스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행크는 공신들에게도 가혹한 면이 있었다. 4번이나 팀의 우승을 이끈 조 토레 감독와의 결별이 시작이었다. 토레와 양키스가 헤어질 때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영구결번 당연한 공신인거 그냥 좋게 구단 임원 자리를 제안하든지 그게 싫으면 굿 럭 한번 해주고 헤어지면 될 것을 굳이 인센티브를 건 오퍼를 제시해 노감독의 빈정을 상하게 했다. 마치 삥소위가 보급관한테 '자네가 보급관인가' 하는듯한 모습이었는데 이런 면은 베테랑 선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극히 부진했던 마이크 무시나가 2008년 시즌 초반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무시나는 제이미 모이어의 투구 스타일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또 뻘소리를 작렬한 것이었다. 의도가 어떻던간에 구단 부사장이 18년차 무시나에게 할 소리는 아니였고 무시나는 '나에겐 왼손투수용 글러브(모이어는 좌완투수였다)가 없다'고 간단히 응수한 후 생애 첫 20승을 찍고 은퇴했다. 이 해 무시나는 꾸준히 떨어지던 직구 구속을 보완하기 위해 슬라이더 비중을 늘리고 오프스피드 피칭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니 행크의 무례함도 일리는 있었던 셈이다. 다행히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후계자로 자기를 닮은 행크 대신 아우구스투스 격인 차남 할을 선택했다. 할이 1년만 더 일찍 간택되었으면 에이로드의 재계약 기간이 조금 줄었을지도 몰랐을텐데 아쉽다.

 4. 이치로의 30년 발언

 2006년 WBC에서 이치로가 출사표를 던지며 '싸운 상대가 30년은 일본을 넘볼 수 없게 이기고 싶다' 말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자기 페이스북에 올려도 좋아요 눌러주는 대신 열도의 흔한 기개.jpg로 돌아다닐판에 일본 언론부터가 한국, 대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아줬고 한국 기자들도 신나게 달라붙어 구도를 만들어주니 살이 붙고 하며 가히 이치로가 이토 히로부미-고이즈미에 이어 망언 삼대장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이 발언에 대해 김병현은 펜웨이파크에서 공개했던 가운데 손가락을 다시 꺼내는 대신 '그냥 만화를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고 촌평했다. 이후 이치로는 야구에서 가장 오래된 방식의 보복을 당했음은 물론이다.

 5. 마이크 스탠튼과 브라이스 하퍼의 친목질

 "아오 빡쳐" 마이애미의 차세대 거포 마이크 스탠튼이 단단히 화가 난 상태로 트윗을 했다. MLB의 창원시장격인 로리아 마이애미 구단주가 간만에 지갑을 열어 호세 레이예스와 마크 벌리를 질러놓고, 생각처럼 성적이 안나오자 1년만에 둘을 다시 트레이드 시킨 것이다. 방망이 깎는 노인도 아니고 백날 천날 기약없이 리빌딩을 가장한 사치세 분배만 받고 있으니 선수 입장에서 욱할 법도 하다. 이 때 워싱턴 내셔널즈(Nats라고도 부른다)의 슈퍼루키 브라이스 하퍼가 멘션을 날렸다. "이리와서 Nats에서 함께 뛰는 건 어때?" Stanton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내 이름을 거꾸로 한게 Not Nats가 아니었으면 그랬을걸 ㅇㅇ"

 6. 클템과 막눈의 초식육식 논쟁

 올림푸스 롤챔스 윈터시즌 파이널에서 아주부 프로스트와 나진 소드가 격돌했다. 경기전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아주부의 정글러 클라우드템플러에게 '나진 정글러 와치가 육식 동물같은 플레이를 보여주는데 반해 클템은 초식성 플레이를 선호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묻자 클템은 센스있게 '와치는 육식동물로 치면 하이에나 급이지만 나는 초식 동물의 제왕 코끼리다' 답변했다. 하지만 마이크를 이어 받은 막눈이 '코끼리는 물론 화가 나면 무섭다. 하지만 하이에나는 똥을 싸도 조금만 싸지만 코끼리는 똥을 와장창창 싼다' 쏴붙이자 순간 장내가 뒤집어졌다. 이 경기에서 정말 클템은 와장창창 싸며 3:0 패배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

 견제구는 아니고 빈볼 : 윤호영은 동부에 있어서 윤호영

 KBL 11-12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정규시즌 승률 8할의 동부와 창단 첫우승을 노리는 KGC가 만났다.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매치업 상대가 될 윤호영과 양희종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양희종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호영이와는 대학 때 늘 매치 업이 됐다. 그 때는 호영이가 많이 넣어야 한 두골 정도였는데….(웃음)" 이런 대목이었다. 김태술과 양희종이 어릴 때부터 주목받으며 연대 전성시대를 이끌어간 주역인 것은 맞지만 윤호영도 중앙대 52연승 주전 멤버다보니 자연스레 두 팀의 감정이 고조됐고 1차전 동부 승리 후엔 윤호영이 "양희종이 나를 막으면 감사하다." 2차전 KGC 승리 후엔 양희종이 또 "광재가 자신 있다고 하던데, 오늘 광재 때문에 이겼습니다. 아까 레이업 상황에서 공중으로 던진 볼, 옆으로 날아가는 포물선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의리를 배신하지 않은 광재한테 잘 해줬다고 말 해주고 싶습니다. 이말 꼭 써주세요." 겐세이를 던진데 이어 "윤호영이 동부에 있어서 윤호영이라고 생각한다. 동부에 특화된 선수다" 등 던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자존심 대결이라 두 선수 모두 부상투혼을 발휘하며 경기에 임했고, KGC가 우승을 차지하자 정규시즌 MVP를 받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윤호영은 취중 인터뷰를 했다가 또 둘 모두 가루가 되게 까이기도 했다. 프로 선수들의 신경전이니만큼 말잘하고 이기면 그만이긴 해도, 경기장에서 플레이하는 거 유심히 보면 생각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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