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3일 토요일

신이라 불릴뻔한 사나이

 PED(경기력 향상 약물) 스캔들에 피해자가 있다면 로저 클레멘스, 앤디 페팃,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모두 좋아했던 양키스 팬인 나 역시 피해자일 것이다. 영화 옹박 홍보문구 '이소룡은 죽었다. 성룡은 늙었다. 이연걸은 약하다'를 처음 봤을 때처럼 충격적이었다. 저 트리오는 은퇴하고, 늙었고, 약한 것도 아니라 사이좋게 약을 했고, 덕분에 멘붕도 3배로 왔다. 뭐 내가 약을 빨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로켓,페팃은 어차피 말년이니 은퇴하고 나서 밝혀지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 정신승리하긴 했지만 2007년 시즌 후 10년 최대 300M 연장 계약을 맺은 에이로드는 도대체 어찌해야 되는가 눈앞이 캄캄했다. 양키스가 계약 당시 32세의 3루수에게 저렇게 큰 계약을 선물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가 42세까지 최고의 기량을 뽐낼 거라고 확신했다기보단, 배리 본즈의 얼룩진 최다 홈런 기록을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깰 백기사를 위한 선물이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행크 스타인브레너 양키스 부사장이 '우리는 양키스를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고 우주의 질서를 되찾을 것이다' 선언했을 때 내 머릿속엔 '포스의 균형을 되찾아줄 젊은 스카이워커'가 떠올랐다. 당연히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2번의 MVP를 딴 에이로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친구 민케노비치의 글러브를 손으로 친 기행은 그저 경기장 안에서의 승부욕이 과도하게 표출됐을 뿐이고, 가을의 빈타야 곧 스탯 회귀의 법칙에 따라 맹타로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PED 스캔들 이후에도 내 상상의 반은 맞았다고 생각한다.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젊은 스카이워커인 것은 맞았다.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닌 아나킨 스카이워커였기에 문제다.



  이제 부질없어진 마일스톤을 치우고 아나킨을 항상 미심쩍어했던 요다의 시선으로 돌이켜보면, 에이로드에겐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머니볼에서 스캇 해티버그가 비디오 분석을 하다 타석에 들어선 에이로드가 포수의 위치를 힐끔 곁눈질하는 걸 발견하는 장면이라거나, 에스콰이어 인터뷰에서 괜히 지터를 디스한다거나, 스포츠맨쉽보다는 게임맨쉽에 가까운 많은 면들이 그랬다. 사족이지만 500홈런, 600홈런을 칠 때 겪었던 극심한 아홉수를 보고 난 미국에도 당연히 아홉수란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다기에 놀랐던 적도 있다. 이렇게 기록을 의식하고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원하는 성격이 그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해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줬을지는 모르나 (더 합리적으로는 약을 빨아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급부로 여린 멘탈도 가져다 주었다. 프레셔를 즐기는 능력을 슈퍼스타의 자질이라고 본다면 에이로드는 분명 그러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아마도 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에이로드를 분석하며 '어릴 때 부모의 관심을 못받았을 것이다' 예상할 것 같은데, 나는 정신분석학과는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성적표 행동발달란을 볼 방도도 없으니 저 가설을 증명할 수야 없다.

 에이로드는 2009년 첫번째 PED 스캔들 때,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고액연봉자로서 부담을 느꼈고 그때만 잠깐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 주장했고, 2008년 미첼 리포트에 이름이 올라있지 않은 것은 맞지만 약쟁이의 말을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당장 저 스캔들을 처음 폭로한 SI 셀레나 로버츠는 책에서 그가 고등학교 때부터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는 내용을 싣었다. 그 기자가 대형 오보를 내고도 별다른 사과를 하지 않은 전력이 없었더라면 누구나 에이로드가 받았던 전미 최우수 고교 야구선수상도 잘못된 수상이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안이 엄청났던만큼, 에이로드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양키스가 보인 반응은 차가웠다. "앞으로 로드리게스는 경기만 뛰면 된다. 노동자(Worker)일 뿐이다. 일 하고 난 후에 급료를 받고 끝나면 사라지는 존재다." 실제로 이후 양키스는 에이로드가 위기에 닥칠 때 그를 보호하지는 않았다. 

 파문이 어떻든간, 양키스는 에이로드와의 재계약을 주도한 행크 부사장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할 순 있었지만 여전히 2016년까지의 계약은 유효했다. 약빨도 떨어지고 자연스레 노화도 오니 금강불괴같던 에이로드도 슬슬 한군데씩 아프기 시작했다. 양키스 이적후 홀수해에 잘하고 짝수해에 '비교적' 못하던 징크스도 깨졌다. 2009년엔 12년 연속 30홈런 100타점 기록(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도 깨지기 일보 직전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2홈런 7타점을 기록하며 간신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ALDS, ALCS에서 시리즈 MVP급 활약을 펼치며 양키스의 27번째 WS 우승에 기여했지만 ALCS MVP는 동료 사바시아의 차지였다. 물론 사바시아도 3일 로테이션을 강행하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지만 PED 스캔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랜 가을삽질을 중단한 에이로드가 MVP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듬해에도 어떻게 13년 연속 30홈런 100타점 기록은 이어나갔지만 그 후는 없었다. NBA 피닉스 선즈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부활하겠다며 설레발을 쳤으나 두 시즌 동안 100경기 넘게 결장했다.

                                                 홈런왕에서 페북왕으로      

 그렇다면 떠넘길 팀은 있을까. 인센티브는 빼도 잔여 연봉만 1억불이 넘게 남았다. 쇠퇴한 경기력을 생각하면 연봉보조 퍼줘가며 넘기지 않는 한 받을 팀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저 친구한테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으니 처분도 어렵다. 그러나 양키스의 대응은 내 생각 밖이었다. 에이로드를 핵심전력으로라도 봤으면 보호하는 움직임을 취했을텐데, 캐시맨 단장이 트레이드 논의를 한 적도 없다고 부인하긴 했으나 이미 뉴욕발 언론들이 덤핑처리 방법이나 은퇴시킬 방법을 연일 보도하고 있는 판에 소스 없이는 나가기 힘든 보도가 아닌가 싶다. 팀 페이롤을 20M 정도 줄일 구상을 가지고 있는 양키스로서도 에이로드가 부상으로 선수생활 못하게 되어서 은퇴한다는 뻥카를 치면, 페이롤은 페이롤대로 줄이고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받아 지불할 수 있긴 하다. 양키스 팬 입장에서 은퇴를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런 식의 꼼수는 양자간 합의가 됐을 때나 써먹는거니 은퇴 종용에 정떼기 수순에 가깝다.

 2013년 시즌을 앞두고 에이로드는 또 수술을 받았다. 전반기 복귀는 불가능한 것은 물론 시즌아웃 확률도 높아보인다. 양키스도 발빠르게 3루 대체 자원으로 유킬리스를 데려왔다. 단년계약이지만 12M이 추가지출 되었으니 가뜩이나 먹튀소리 듣기 딱 좋은 판에, 두번째 PED 스캔들이 터졌다. 다른 선수들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지만 마이애미 약팔이 앤소니 보시에게 에이로드가 직접 성장 호르몬을 주사받았다는 주장이 핵심인데, 에이로드 측이 즉각 부인하긴 했지만 약팔이가 직접 작성한 기록이 남아있고, 같이 훈련을 하던 멜키도 명단에 있다니 의심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성장 호르몬이라니 부상 회복을 위해 썼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아직 조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사실로 드러난다면 첫번째 스캔들 당시 했던 말도 믿기가 어렵다. 구단이나 지터가 그를 두둔하지 않는 것도 자업자득이긴 하다.

 이제 에이로드가 설령 763홈런을 친다 해도 그는 건강한 미키 맨틀이 아닌 제2의 배리 본즈라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PED는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한때의 실수'가 아닌 '부정한 행위'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그러한 치터가 이미 들어가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덜미 잡힌 치터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에이로드가 남은 거액을 포기하고 은퇴하리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양키스를 위해 할 수 가장 좋은 일은 연신 삼진을 당하고 덕아웃에 들어와 박수를 치는 게 아니라 지터의 3500안타를 축하하는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일같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절치부심해서 30홈런은 쳐주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걸 바라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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