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9일 수요일

21대 총선과 탄핵의 강

 나는 첫 선거부터 06지선 - 07대선 - 08총선 - 세훈아 방빼까지 족족 지는 쪽에 표를 던지고 오세훈이 진짜 셀프로 방을 빼버린 후에야 이기는 쪽에 투표할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 다음에도 지선 때나 싫어하지 않는 후보가 이겼고 12총선-대선-14재보궐에서도 3연벙을 당했기 때문에 투표도 올림픽 정신으로 했지 별로 효용체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고백컨대 나는 아직도 개표날 자정이 넘으면 서울광장쪽 어디에선가 승리선언이 들려오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4년 전 내가 지지하지 않던 당이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한 20대 총선 결과를 보며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을 땐 우선 들어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후 탄핵정국에서 이어지는 대선 레이스에서는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적어도 겉으로는 가지게 되었다. 그런 내가 볼 때 선거제 개편은 20대 국회에서 다당제를 제대로 해볼만한 의석균형이 갖춰줬다는 것, 다당제도 한번 해봐야한다는 것까지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중심제에서 다당제가 난립하면 바이마르 공화국-여긴 내각제지만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으니- 꼴 밖에 더 나냐는 의견 쪽에 더 일리가 있다고 봤다. 

 결론적으로는 선거제 개편은 다당제를 가져오지 못했고 미래통합당의 제도우회와 더불어민주당의 상응조치를 막지도 못했다. 가장 큰 수혜자가 될거라고 생각했던 정의당도 아무 재미를 보지 못했다. 20대 국회에서 캐스팅 보트를 자처하던 정당들이 4년동안 보여준 행동 중에 인상적이었던 건 바른미래당이 터지면서 보여준 한심한 모습 밖에 없었음도 함께 밝혀둔다. 그 모습을 본 국민들의 선택은 양당체제로의 회귀였고 당분간 다당제는 말도 꺼내기 힘들게 되었다. 50cm에 가까운 비례투표지를 남기고 선거법 개정은 결국 실패했다.

 문제는 선거법 개정을 반대하던 미래통합당이 결과적으로 '내가 뭐랬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폭삭 망했다는 데 있다. 미래통합당이 저렇게 폭망한 이유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것도 없이 그냥 하는 행동들이 다 이상하고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제일 가소로운 이야기가 바로 유승민 의원이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탄핵의 강을 건너자'이다.

 유승민 의원-아직까진-은 틈만 나면 무슨 강을 자꾸 건넜다고 한다. 박근혜씨와 대립하더니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하고,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당선이 된 후 다시 들어가더니 또 당을 나와 김무성 의원과 입술을 나누더니만 함께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하고, 뽀뽀한 사람이 보수통합한다고 다시 돌아갈 각을 보던 때도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하고 아무튼 이후로도 몇 번 그 강을 더 건넜다가 왔다.

 [지난 3년간 우리 동지, 현역 의원만 25분이 돌아가서 개혁하겠다는 자유한국당 개혁됐나]라고 일갈한 후 [가다가 죽으면 어떤가. 가다가 제가 죽으면 제 후배가 그 길을 갈 것이고, 한 사람씩 그 길을 가다 보면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깊은 감동을 주더니만 한 달 만에 개혁이 됐는지 가다가 죄다 죽었는지 미래통합당으로 돌아간 유승민 의원은 이렇듯 건넜다는 강도 많지만 '탄핵의 강'도 건너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건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일까? 유승민 의원의 말에 따르면 [탄핵은 보수가 미래로 나가기 위해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게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이야기란다. 얼핏 들으니 선거가 코앞이니 탄핵은 잘한거다 아니다로 싸우면 안되니까 일단 덮자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 오해를 사면 곤란하니 그러면 원희룡 지사의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우선 탄핵 때는 찬성했던 분들도 있고 반대했던 분들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은 그 토론이 기존에 한국당 내에서라든가 아니면 지금 미래통합당에서도 종결이 지어진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걸 토론을 통해서 끝장을 내려고 하면 사실은 더 많은 시간과 많은 진통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어떡합니까? 선거는 다가오고 있고 우리 국민들은 믿고 지지할 야당이 없으면 정말 문재인 정권의 반사 이익에 손을 놔야 되는 그런 상황인데 그래서 과거에 대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께 반성을 하면서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 힘을 합하자라는 거고요. 그런 점에서 우선 공천 과정에서부터 탄핵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인물들을 많이 국회로 들여놓는 것. 그래서 탄핵의 트라우마로부터 야당은 벗어나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100%는 아니겠지만 그게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봅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3323943)

 내가 얼핏 들었던 게 -일단 묻고 가자- 틀렸던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여러 세력의 통합이 필요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씨를 탄핵한 게 잘한거냐 잘못한거냐는 논쟁은 대단히 민감한 이슈라 덮고 가고 싶을 수 있다. 그런데 정치인 본인들이 그러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탄핵이 잊혀지는 일은 아니다. 탄핵 인용 다음날에 전국 성인남녀 1008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헌재의 탄핵 인용에 대한 긍정평가는 86%였고, 승복해야 한다는 응답은 조금 더 높아 92%에 달했다.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590806615862336&mediaCodeNo=) 이렇게 국민이 압도적으로 지지한 일을 과거 평가없이 그냥 묻고 가는 건 그러고 싶은 사람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미래통합당이 도로친박당이 되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합당과정에서 일부 극성스러운 친박세력을 배제하였고, 욕먹었던 공천과정에서도 탄핵 n적이니 진박 n인이니 하는 사람들을 걷어냈고 덜 걸러진 사람들도 대부분 유권자가 알아서 걸렀다. 하지만 동시에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있는 박근혜씨가 옥중서신이니 뭐니 하는 걸 보냈고, 그걸 또 황교안 대표가 '이 나라, 이 국민을 지켜달라는 박 전 대통령의 애국심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웅장해진다가 아님- 이렇게 받았던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일당 독재국가였던 소련도 스탈린 사후에 격하운동을 했고 중국도 사인방을 진압한 등소평이 모택동에게 공칠과삼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민주국가의 정당이 현재 지도자에게는 무능 정권의 좌파폭주를 막아야 한다고 평가하면서 이미 파면당한 과거 자국 지도자를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평가 없이 나라의 현재를 진단하는 것도 우습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내놓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탄핵에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의무가 있다. 탄핵을 한 게 잘한 거라면 자기 당 출신 대통령의 폭주를 왜 막지 못했는지 사과하고 반대로 탄핵을 한 게 잘못한 거라면 탄핵을 찬성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또 박근혜씨가 저지른 수많은 탈법적인 행동은 어떻게 생각하고 대통령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기업에 돈을 내라고 요구해도 되는지, 청와대에 검문도 없이 이상한 사람들이 들락날락한 건 어떻게 생각하고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국민들을 설득하여야 한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말과 글로 싸워서 합의된 결론을 낸 후에야 탄핵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017년 4월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북한이 주적입니까?]라고 물었다. 유승민 의원이 그 후로도 이 정도로 강을 많이 건넜으면 이번엔 다음 강을 건너기 전에 같은 당 정치인들에게도 마땅히 물어야 한다. [박근혜를 탄핵한 게 잘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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