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9일 화요일

(발번역) 학창시절 학대를 받았던 구로다 히로키

 원문 링크

 재작년 이맘때 기사인데, 관련 사이트에 발번역해 올렸다가 개발퀄이라 삭제했던 글이다. 엊그제 구로다 등판 보고 생각난 김에 다시 했다.




 소년 시절 구로다는 오염된 강에서 강물을 마시게한 폭력적인 감독을 피해 숨었다. 갈증에 고통스러워 하고, 진흙탕에서 물을 마시는 동료들이 보였다. 때로는 화장실에서 그렇게 해야했던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20년 후 현재, 구로다 히로키는 예전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고 견디던 그때의 그 소년을 떠올리고, 설명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시대였어요. 감독이 당신이 물을 마시면 안된다고 믿던 때요."

 1975년에 태어난 구로다는, 긴 노동시간과 가혹행위가 일반적이었고 선배가 후배를 괴롭혀도 용인되던 문화가 잔존하던 마지막 세대다.

 덥고 습한 오사카의 여름에 연습은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진행되었다. 구로다는 방망이로 두들겨 맞았으며, 여러 시간 동안 맨다리로 도로에 꿇어앉는 것을 강요당하곤 했다.

 "많은 선수들이 쓰러지곤 했어요." 구로다는 그의 통역사 니무라 켄지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했다. "강가로 가서 물을 마시곤 했습니다. 깨끗한 강이 아니었지만, 깨끗하다고 믿고 싶었어요. 그다지 아름다운 강은 아니었지요."

 "경기를 하기 위해서 살아남아야 했어요. 살아남고, 경기를 뛰기 위해서 그렇게 면역 시스템을 훈련하곤 했습니다."

 비록 고등학교, 대학교 감독들에게 탑 유망주로 간주된 적은 없으나, 구로다는 오늘날 가장 성공한 일본인 투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3.41의 통산 방어율은 12번 이상 선발 등판한 그 어떤 일본인 투수보다 좋은 수치다. 노모, 마쓰자카, 다르빗슈를 포함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즌 8승 7패, 3.14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구로다는 이번 금요일 펜웨이파크에서 펼쳐지는 보스턴과의 경기에 출전한다. 앤디 페팃과 C.C 사바시아가 부상을 당하며 양키스는 구로다에게 두 투수 대신의 호투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연해 보인다.

 농담삼아 만약 요구받는다면 200구를 던질 수 있냐고 그에게 물어봤다.

 "저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힘이 들겠죠. 그렇지만 요구받는다면,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시도해볼 겁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엔 이유가 있고, 그게 제가 지금 메이저리그에 있는데 도움을 줬으니까요."

 그가 유년 시절 겪었던 고통을 회상하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좀 더 야구를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1990년 어느 여름날, 구로다는 15세였고 우에노미야 고교의 투수였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제구가 잘 되지 않은 것이 고질적인 문제였지만 스트라이크를 던져도 상대 타자들은 쉽게 두들겼다.

  오래지 않아 감독은 자신을 언짢게 한 다른 선배 한 명과 구로다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뛰어라.'

 늘 그렇듯, 끝이 정해지지 않은 명령이었다. 모든 선수들이 그렇지만, 특히 10대 시절 구로다처럼 발버둥 쳐야하는 처지였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외야로 나가서 파울 폴대와 반대편의 파울 폴대 사이(야구장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려라. 물을 마시지 말고.

 구로다는 유니폼을 갈아입어가며 나흘 동안이나 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 동안 더 잘 플레이해야한다, 그리고 실수를 하면 안된다고 끝없이 자신에게 되뇌였다.

 그가 이야기한 내용은 믿기 어려웠지만, 구로다는 내내 사실임을 강변했다.

 지시가 떨어지고, 오전 6시부터 오후 9,10시까지 달려야 했다. 끝나는 시간은 감독이 잠자리에 언제 드느냐에 따라 달랐다. 물론 15시간 내내 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구로다는 최선을 다했다. 일본어로 '칸토쿠'라고 읽는 감독이 보고 있지 않을 때엔, 걷기도 했다.

 감독이 자신의 사무실에 점심을 먹으러 갈 때면, 팀원들이 몰래 물이나 주먹밥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최고로 맛있는 물이었어요. 어떤 5성 호텔의 음식보다 나았습니다."

 감독이 퇴근하는 밤이 되어서야 구로다는 달리기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욕실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7시즌 동안 일본 프로야구 감독 생활을 한 바비 발렌타인은, 그 곳에서 지내며 많은 일본 선수들에겐 익숙한 일과 일상에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그에게 구로다가 받은 가혹행위를 설명하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10시에는 달리기를 끝낼 수 있었다구요? 음, 진보적인 감독이었나보네요."

 4일 밤낮을 그렇게 보내자, 구로다의 팀원의 부모가 거기에 개입했다. 구로다와 선배를 자기 집에 데려와 음식과 물, 목욕물을 제공했다. 그리고 구로다의 어머니를 불러 상황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저를 기숙사로 돌려보내라고 하셨어요. 그 때 저는 우리 집에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로다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구로다의 아버지는 한때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외야수로 뛰었었고, 은퇴 후에 스포츠 용품점을 경영했다. 그는 아들이 야구를 하기로 결정한 이상, 감독에게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문제에 대해 조금은 더 열려 있었다. 적어도 어머니는 구로다에게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감독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미국에서 저러한 방식은 범죄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일본도 학부모들의 소송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문화권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감독의 행동이 아동 학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네요." Positive Coaching Aliance의 창립자이자 대표 짐 톰슨의 말이다.

 이게 구로다가 파울 폴대 사이를 달려야 했던 유일한 사건은 아니고, 가장 극단적인 경우였을 뿐이다. 심지어 모든 종류의 가혹행위를 제외하고서도 일본의 학생 야구선수들에겐 큰 부담이 지워져 있다.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훈련을 하고 학교에 간 후, 저녁 10시나 11시나 되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다.

 "수업에 들어가는 것은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죠. 가끔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구로다가 일본 야구의 구식 문화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였다. 그가 실수를 저지르면, 감독은 '빠따 결단'이라 불리는 가혹 행위를 집행했다. 야구 방망이로 맞는다 (빠따) / 엉덩이를 (결단)

 "초등학교였지만 거의 군대 같았지요. 시합에서 실수를 하면 어김없이 야구 방망이로 맞아야 했죠. 다음날이면 아파서 학교 의자에 앉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안타를 맞은 날에도 '빠따 결단'이 날아왔습니다. 팀에 들어가 야구를 하게 된 첫번째 경험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1학년부터 4학년때까지 쭉 그랬네요."

 구로다의 아버지 카즈히로 구로다가 팀의 코치를 맡게 된 5학년 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구로다가 야구에서 재미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야구를 하는 것을 날마다 고대했다.

 "제 야구 인생 중 그때가 가장 즐거웠었습니다. 엄격한 규율없이 순수하게 야구를 즐길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고문과도 같은 일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겪은 가혹행위는 감독만의 행동이 아니었다. 선배들의 군기잡기도 또다른 위협이었다. 구로다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매우 그로테스크했다'고 표현했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맨다리로 달아오른 땅바닥에 꿇어앉히고, 때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가 대학에 갔을 때도 저 악폐습들은 반복되었다. 마쓰자카나 다르빗슈같은 고졸 선수와 달리, 구로다는 우에하라처럼 고등학교 시절에 만족할만한 지명을 받지 못했고 센슈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마무리 훈련 혹은 연습경기 때나 투구를 했고, 그 외에는 항상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스카우터들은 그가 경기에서 던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센슈 대학에선 4인 1실의 기숙사를 썼고 구로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입생은 선배들이 일어나기 전에 세탁실로 향했다. 선배들이 일어났을때 그들의 옷은 순서대로 잘 개켜져 있었고, 양말은 후배들이 손빨래를 했다.

 "신입생들은 기본적으로 노예였습니다. 만약 의무를 게을리하면, '무릎 요법'을 다시 받아야 했어요. 뜨겁게 달궈진 기숙사 지붕 위에서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조롱당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광경은 희미해지고, 일그러집니다. 다리는 감각이 없어져서 방에 돌아올 땐 기어야 해요."

 그리고 대학에서도 달리기는 계속되었다. 햇볕이 뜨겁게 쏟아지는 날엔 그렇지 않았지만 비가 올 때는 달렸다. (역주 :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음) 그렇지만 감독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의 뼈도, 말들도 메말라있었다.

 그의 강견 탓에 1996년 드래프트 때 히로시마 카프에 지명되었고, 1997년에 데뷔를 하게 되었다. 프로에서의 삶은 좀 더 수월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달리기는 덜 가혹했고 가혹행위도 없었다. 구로다는 히로시마에서 9년을 뛴 후 2008년에 LA 다저스에 입단했고 성공할 수 있었다.

 구로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싸워나갔고, 학창시절 야구를 거의 그만두기 전까지 그를 몰고 갔다. 그는 비록 자신이 겪었던 방식들을 절대 추천하지 않지만, 최종적으로 그가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훌륭한 메이저리그 투수가 되는데 일조했었을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야구계에서 가장 훈련에 열심인 선수로 알려져 있는 구로다는 여전히 달린다. 그러나 파울 폴대 사이를 하염없이 뛰는 대신, 양키스 체력 코치의 처방을 받는다. 그는 삶과 성격이 준 과거의 시련을 받아들였다. 지난 주엔 경기 전 덕아웃에 앉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안타를 맞고, 점수를 내주는 건 두렵습니다. 제게 뿌리깊게 박혀있지요."

 '깨끗한' 물통을 주물럭거리던 구로다는, 통역을 통해 인터뷰가 끝난 것이냐고 물었다.

 달리기 훈련을 할 시간이었다.


 2012년 7월 12일 기사.



 그리고 2000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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