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6일 목요일

(발번역) ESPN : 2015 MLB 명예의 전당 헌액자와 비교할 수 있는 NBA 선수들

 원문 : http://espn.go.com/nba/insider/story/_/id/13374623/nba-how-nba-greats-shaquille-oneal-allen-iverson-compare-recent-baseball-hall-famers

 2주전 MLB 네 명의 선수가 쿠퍼스타운에 입성했다. 이 위대한 선수들과 비교할 수 있는 NBA 선수들은 누구일까? 

  NBA가 보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여름 동안에 당신이 할 법한 질문이다. 내가 이 질문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세이버매트릭스를 공부하던 2008년 대학생 시절에 야구의 넘버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 '스포츠 산업'에 들어왔고, 2009년에 야구보다 통계 분석의 역사가 짧았던 NBA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어렸을 때 나는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존 스몰츠, 크레이그 비지오들을 보고 자랐고 이들은 가장 최근에 명예의 전당으로 콜업된 4명이다.

 올해의 헌액자들을 농구 선수와 비교하기 위해 야구와 농구를 잇는 가교를 세워보았다.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과학적 방법을 따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NBA 선수를 고르기 위해 연구를 했다는 것은 보장할 수 있다. 사실 선수 개개인의 특성뿐만 아니라 통계를 통해 업적을 평가하는 것도 비중있게 다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과학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괜찮다. 그저 재밌자고 하는 일이니까. 
NBA의 랜디 존슨 : 샤킬 오닐

 같은 왼손잡이 괴물들인 데이비드 로빈슨이나 카림 압둘 자바를 선정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1. 신체 사이즈
오닐과 존슨은 인간의 신체 조건 분포값에서 'Outlier'한 존재다. 샤킬 오닐은 7피트 1인치(약 216cm)에 300파운드(136kg) 이상(아마 때때로 350 에 근접하기도 한)의 거한이었음에도 탄력 있는 포워드처럼 코트를 누볐다. 이 거인들의 스포츠에서 그와 같이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운드 위에서 존슨은 상대 타자를 리틀야구 선수처럼 보이게 했다. 6-10의 존슨이 공을 던질 때면 왼팔이 홈 플레이트를 가로지르는 것 같이 보였다. 타자는 눈을 가린 채 피냐타(장난감과 사탕이 가득 든 통이라고 함) 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놀이를 하는 아이와도 같았다. 그것이 오닐과 존슨을 '빅 아리스토텔레스', '빅 유닛'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2. 압도적인 기록 : 탈삼진과 덩크
 오닐과 존슨은 결코 신체 수치만 가지고 유니크한 선수가 된 것이 아니었다. 존슨은 치기 힘든 강속구와 슬라이더의 조합으로 MLB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탈삼진(4,875개), 9이닝당 탈삼진 10.61개를 기록했다. 그가 애리조나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2001 시즌엔 무려 372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는데, 30년 이상 비슷한 기록은 없었다.
 오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덩크를 꽂는 것으로 NBA를 평준화시켰다. NBA는 1997년부터 덩크슛을 집계했기에 오닐이 데뷔 후 4년 동안 성공한 덩크슛의 숫자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닐이 기록한 2,665개의 덩크는 2위 드와이트 하워드의 기록(2,148개)보다 500개 이상 앞서 있다.  오닐이 레이커스에서 쓰리핏을 이룬 2000년부터 2002년까지 746개의 덩크를 성공시켰다.  그 기간 동안 그 외의 누구도 400개 이상 덩크를 하지 못했다. 존슨과 오닐은 같은 시기에 리그를 지배했던 것이다.
 3. 커리어 동안 잦은 이적
 입은 유니폼의 사이즈가 큰 만큼 종류도 다양했다. 존슨과 오닐은 여러 팀을 옮겨다녔다. 존슨은 22년 동안 6개 팀에서 뛰었으며, 양대 리그(AL:시애틀, NL:애리조나)에서 모두 사이영상을 받았다. 그래서 (애틀랜타에서만 뛴) 존 스몰츠와 달리 그가 어느 팀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해야 되냐는 논쟁도 있었다. 결국 애리조나를 선택했지만.
 올랜도에 전체 1순위로 드래프트 되었던 오닐은 18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존슨과 비슷한 갯수의 유니폼을 입어보았다. 호수네에 3번의 우승을 안겨준 후엔 자신의 재능을 마이애미로 가져갔고, 거기서 4번째이자 마지막 우승 반지를 얻었다. 그 후엔 한시즌 반을 피닉스에서 뛰었는데 이는 랜디 존슨이 휴스턴에서 반년 렌탈 생활을 한 것을 연상시킨다. 존슨이 커트 실링과 원투 펀치를 이뤘듯 오닐도 코비와 웨이드라는 파트너들과 함께 뛰며 반지를 얻었다. 
NBA의 페드로 마르티네즈 : 앨런 아이버슨 
나에게 있어 또다른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선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크리스 폴, 존 스탁턴, 제리 웨스트를 제치고 아이버슨을 선정했다.
 1.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앞에서 말한 오닐과 존슨처럼, 페드로와 아이버슨도 사이즈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페드로는 5-11 피트에 170 파운드였지만 마치 재이 알라이(스쿼시와 비슷한 운동 같음)에서 서브를 날리는 선수처럼, 기형적으로 뒤로 구부러지는 손가락으로 공을 뿌렸고 '스테로이드 시대'를 지배했다. 
 아이버슨은 학창시절 미식축구와 농구를 병행하며 버지니아주 올해의 고등학교 선수상을 수상했다. 겨우 6피트의 키로 127번의 덩크를 날렸고 이는 데릭 로즈, 카이리 어빙, 스테판 커리가 커리어 동안 기록한 덩크슛의 합계(총 120개)보다 많다. 이들 중 아이버슨만큼 작은 선수는 아무도 없다.
 2. 그들은 상대를 골려댔다
  페드로는 야구에서 가장 지저분한 공을 던졌던 선수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세개나 되는 파괴적인 구질을 지녔다. (포심, 써클첸졉, 슬러브를 이야기하는 것 같음) 그리고 그는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상대하면서도 유별난 프라이드를 숨기지 않았다. 1999년 페드로가  브롱스 폭격기들을 상대하며 17K 완투승을 거뒀던 경기를 보라. 양키스 3루수였던 스캇 브로셔스는 홈플레이트에서 5피트나 벗어난 공에 배트를 휘둘렀다. 페드로는 "(밤비노의 저주에 대해) 그 빌어먹을 놈의 베이스 루스를 깨워와라. 내가 엉덩이를 차줄테니" 라고 입을 털기도 했다.
 아이버슨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전매특허 무기였던 크로스오버 드리블은 수비수들을 바닥에 나뒹굴게 했으며, 허세 넘치고 두려움없는 플레이는 그를 문화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만약 당신이 NBA 팬이라면 아이버슨이 마이클 조던을 크로스오버로 속이고, 타이론 루를 따돌리고, 마커스 캠비를 상대로 풋백 덩크를 꽂아넣는 장면을 적어도 백번은 넘게 봤을 것이다. 
 3. 짧았던 전성기, 그럼에도 존경받는
 페드로와 아이버슨은 같은 시기에 뛰었던 다른 엘리트 선수들에 비해 전성기가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숭배받는 위치에 있던 선수였다. 페드로가 선발 등판할 때마다 마치 구단 샵에서 파는 상품마냥 많은 숫자의 도미니카 국기가 나부꼈으며, 아이버슨의 힙합 스타일은 당시 세대를 강타했다.
 생산력 측면에서 봤을 때, 아이버슨은 페드로만큼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맹렬한 스타일과, 사이즈에서 오는 문제에서 기인한 빠른 몰락을 공유했다. 아이버슨은 34세에 리그를 떠났으며, 페드로는 33세 이후 시즌에서 10승 이상을 거둔 적이 없었다. 선수로서는 페드로가 아이버슨보다 나았으나, 문화적으로는 아이버슨이 남긴 물결이 더 컸다.
 NBA의 존 스몰츠 : 마누 지노빌리  
 결정하기 가장 쉬운 항목이었다. 팀 던컨과 레이 알렌에겐 미안하지만, 왜 지노빌리가 아르헨티나의 스몰츠인지 설명할 수 있다. 
 1. 벤치 엘리트 
 존 스몰츠의 커리어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아마 마무리 투수로서 경력 후반부에 르네상스를 맞은 때였을 것이다. 스몰츠는 1996년 사이영상 위너였고 10년 동안이나 애틀랜타의 엘리트 선발 투수였지만, 2000년에 토미존 수술을 받은 후엔 마무리 투수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4년 동안 애틀랜타의 뒷문을 지키는 동안 2002시즌에 55세이브를 거두며 리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선발, 마무리로 모두 올스타전에 참가했으며 탑 릴리버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지노빌리? 역시 비슷하다. 2004-05시즌 우승팀의 올스타 선수였던 지노빌리는 식스맨으로 전환했고, 팀의 앵커가 되어 2006-07시즌 스퍼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클리블랜드와의 NBA 파이널에서 지노빌리는 그 날  27득점 중 8점을 마지막 1분에 쏟아부어 팀의 1점차 신승을 이끌기도 했다. 스몰츠가 그랬던 것처럼 지노빌리도 그 후 팀의 스타팅 라인업에 돌아왔고 문제없이 재적응하는데 성공했다. 
 2. 역사적인 삼두정의 일원
 그렉 매덕스와 톰 글래빈을  빼놓고 스몰츠를 논할 수 없다. 스몰츠와 그 두 명예의 전당 투수들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애틀랜타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되어 90년대를 질주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도 마누 지노빌리-팀 던컨-토니 파커가  왕조를 건설했고 10년 동안 유지했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지노빌리는 시즌 MVP 던컨, 파이널 MVP 파커와 마찬가지로 MVP 자격이 있는 선수이다. 스몰츠 역시 매덕스-글래빈-스몰츠 트리오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3. 전세계 탈모인에게 영감을 주다
  30세 생일 전에 이마 라인이 후퇴하고 모발을 상실했던 나는 스몰츠와 지노빌리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 스몰츠가 모자를 벗고 그의 꿀두피를 드러낼 때마다 수백만의 민두노총 회원들이 연대하며 환호한다. 농구선수인 지노빌리에게는 모자가 없으나 부분 가발을 이용한다.
NBA의 크레이그 비지오 : 레지 밀러 
 이걸 선정하며 두통이 밀려왔다. 비지오를 쉐인 베티에나 브루스 보웬과 비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비지오와 같은 클래스에 도달하지 못했다. 존 스탁턴이나 크리스 폴과 같은 혈기왕성한 가드들을 고려해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레지 밀러가 더 많은 체크 박스를 채운 선수였다.
 1. 한 팀에서의 길고 솔리드한 커리어 
 비지오는 20시즌을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보냈고, 2007시즌에 신인이었던 헌터 펜스와 함께 뛸 때는 41세였지만 은퇴하지 않은 채였다. 7차례나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그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여겨지진 않았고 MVP 투표 3위 안에 든 적도 없다. 그는 솔리드한 플레이를 하는 메트로놈 같은 존재였다. 
 밀러 역시 1987년에 드래프트된 이래 40세 생일이 멀지 않은 때까지 인디애나 페이서스 한 팀에서만 뛰었다. 비지오처럼 밀러도 올스타전의 단골손님이었지만, 그의 시대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휴스턴과 인디애나의 팬들이 증언할 수 있듯 비지오와 밀러는 각각의 팀에서 오래 뛰었으나 결국 우승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성가심/연기로 알려진
 5-11에 185파운드의 비지오에게 공을 던지는 것은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야구에서 가장 위대한 'Bean bag'이 되어 갔다. 통산 285개의 HBP는 현대 야구에서 제일 많은 기록이다. 몸쪽 코스로 공이 들어올 때 비지오는 제자리에 선 채로 팔꿈치 보호대에 공이 튕겨나가게끔 했고, 수년 동안 수많은 투수들이 분노했다. 그렇게 공을 맞아 출루한 비지오는 도루를 하곤 했다. 
 레지 밀러는 아마도 뉴욕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악당이자 코트 위의 명배우 중 하나일 것이다. 비지오가 팔을 잘 쓰는 선수로 알려지는 동안 밀러는 파울을 유도해 자유투를 얻는 걸로 명성을 떨쳤다. 밀러는 NBA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자유투 능력을 가진 선수 중 하나였으며, 자유투를 얻는 능력도 그에 못지 않았다. 
  3. 힘이 아니라 교묘하게
 비지오는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평균적으로 시즌 14.6개의 홈런을 때려냈지만, 그가 리더보드에 오른 것은 2루타, 볼넷, 도루, HBP였다. 비록 수비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포수-2루수-외야수로 포지션을 옮겨가는 적응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밀러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힘이 좋지 않았고 비지오같은 '5툴 플레이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통산 3점슛 기록을 갱신했을만큼 외곽을 지배하는 선수였다. 비지오가 어떻게든 출루를 했던 것처럼, 밀러 역시 효과적으로 점수를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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