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극한 직업 : 프로게이머

 0) 들어가며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리그(이하 롤챔스) 섬머시즌 우승팀인 KT 애로우즈에서 두 명의 선수가 떠났다. 9월 30일 계약이 만료된 카카오, 루키가 중국팀과 계약해 떠난 것인데 KT 측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기사(링크)에서 그대로 인용하자면 'KT 롤스터는 "최근 중국으로부터 국내 우수선수를 상대로 직접 접촉하여 영입을 시도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나, 현재 국내에는 이러한 식의 선수 이탈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라고 전했'으며 '선수들의 중국진출 의사를 존중하여 두 선수와 계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것인데 곱씹어 생각할수록 참 희한한 말이다.

 첫째로 중국팀에서 국내 선수를 대상으로 직접 접촉하여 영입을 시도하는 일이 발생한다는게 계약기간 내의 사전 접촉(템퍼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숙소생활을 하는 프로게이머들의 특성상 시즌 중의 명백한 사전 접촉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만약 있었다고 해도 엄연히 라이엇이 직접 전세계 리그를 관할하고 있는 이상 KT팀 차원에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테니 그러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절차상으로는 문제없었음을 반증한다.

 두번째로 선수들의 의사를 존중하든 아니든 계약이 끝났으면 당사자 합의가 있어야 새 계약을 하는게 상식인거지 풀어준다는 늬앙스도 얼척없다. 썸녀가 다른 애랑 연애하게 되서 자동적으로 내가 까였으면 그냥 까인거지 어떻게 '썸녀의 의사를 존중하여 더욱 진도를 나가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라고 말할 건덕지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뭐 KT 입장에선 리그 MVP 정글러와 미드라이너를 동시에 잃고 스카웃에 돈도 쓰기 싫어서 2팀 체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으니손해본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서로 계약기간을 롤드컵 전까지로 잡아놔서 여차하면 작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저런 말 하는 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고, 그동안의 팀의 무브를 살펴보면 가소롭기까지 하다. 2012년 윈터 시즌을 앞두고 창단해서 딱 2년 동안 12명이나 (KT B팀을 포함하면 19명) 선수가 자의든 타의든 팀을 떠났으면 매 시즌마다 팀을 갈아엎은건데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제도적인 장치' 운운은 안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그럼 프로 구단들이 선수 이탈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까지 필요할 정도로 대우를 해주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한국콘텐츠진행원에서 발표한 '2013년 이스포츠 실태조사' 보고서를 통해 프로게이머들에 대한 흥미로운 통계들을 살펴볼 수 있다. 전체 프로게이머 응답자 108명 중 스타크래프트2 게이머가 97명, 리그 오브 레전드 게이머가 10명, 카트라이더 게이머가 한 명으로 추정된다.

 1) 통계로 보는 프로게이머

  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 미혼, 남자, 만 16세에서 24세 사이의 전업 게이머들임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자기 직업을 찾은 사람들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전국 평균 대학진학률이 78.8%에 달하는 것에 비추어봐서 진학률은 낮다. 학업을 위해서라기보단 입대를 늦추기 위해 대학 혹은 대학원을 선택한 경우도 있을 거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나. 얼마나 일을 하는가


   평균적으로 주당 평균 6.17일, 일 평균 10.88시간을 연습실 혹은 합숙소에서 보내고 있고어리면 어릴수록 더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하고 있다. 물론 경기에 출전하는 시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실제 노동량은 훨씬 더 많을 것이 자명하다. 숙소 내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는 http://www.82cook.com/entiz/read.php?num=1606320 이 글을 읽으면 좋겠다.

 다. 얼마나 버는가



 [닥터롤]‘판도라의 상자’ 롤 프로게이머의 연봉이 알고 싶다고? (링크)

 승자독식 구조이니만큼 수입 차이가 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직업으로서 추천하긴 어렵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팀인 한 곳은 창단 초기에 오히려 서울시내 대학가 원룸 월세 수준의 숙식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선수에게 숙식비를 받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스폰이 있을 때도 아니라 어쩔 수 없을 거라고 넓은 비지니스 프렌들리 마인드로 넘어가보자.

 2002년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 상금이 2천만원, 본선 진출 상금이 150만원이었고, 지금 롤챔스 우승 상금이 8천만원, 본선 진출 상금이 600만원이다. 스타리그 우승 상금이야 혼자 먹지만, 롤챔스 상금은 최소 다섯이 나눠 먹어야 한다. 물가 상승분을 감안하지 않아도 오히려 상금이 줄었다. 망겜 소리 듣는 스타크래프트2 GSL도 우승 상금 7천만원, 준우승 상금이 천오백인 거에 비하면 저건 너무 한거다. 물론 롤드컵이라는 총상금 200만 달러 짜리 거대 대회가 있긴 하지만 지역별로 출전 쿼터가 있는데다 해외로 나가서 도전하기엔 리그별 외국인 제한도 있어서 한국에서 출전하긴 쉬운 일이 아니다.

 선수 연봉도 마찬가지다. 2002년에 임요환의 연봉이 1억을 넘었고, 2004년쯤 가면 홍진호나 이윤열, 강민 같은 선수들은 다년 억대 계약도 곧잘 했다. 팀별로 부익부 빈익빈은 있었지만 2006년 기준으로 연봉 7천만원 이상 선수만 무려 12명이 넘었다. (링크) 물론 저 시절이 거품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고 당시라고 해도 요순시대는 아니기 때문에 양극화는 똑같았다만 뭐 그렇다고 지금이 나아진 건 아니니까.

 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가


 수입도 수입이지만, 프로게이머란 직업을 극한직업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직업의 불안정성이다. 솔직히 저 통계를 보면 보통이 30.6%나 있는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나마 대기업 팀들 위주로 조사를 해서 그런가 3개월 단위로 팀들이 사라지고 군대에 다녀오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 직업에서 저 정도 만족도가 가능한게 놀랍다.

 2) 발전한 점

프로리그 중계권료 협상이 되지 않았다고 개인리그 예선에서
선수를 보이콧 시키는 케스파의 아름다운 모습.
 물론 스타1 시절보다 지금이 나은 점도 찾을 수 있다. 중계권 사태 이후 스타1판은 철저하게 기업들의 모임인 케스파 위주로 돌아갔고 당연히 담합과 불합리함이 판을 치는 구조가 굳어졌다.

 프로게이머를 하고 싶으면 우선 케스파가 주최하는 커리지 매치에서 일정 성적을 거둬 준프로게이머 자격을 얻은 다음, 드래프트에서 팀의 지명을 받아야 했다. 만약 팀의 지명을 거부할 경우엔 3년 자격정지를 받게 되고 자동적으로 프로게이머의 삶은 날아가게 된다. 상식적으로 드래프트 제도는 최저연봉제에 기반해서 시행을 해야 한다. 팀의 사정에 따라 대우가 극과 극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있었으면 내가 애초에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이스포츠 판에 최저 연봉은 없었다. 너 아니여도 할 사람 많다는 열정페이 정신과 팀들의 담합으로 이루어진 리그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프로게이머 자격이 없다면 개인리그 예선에도 참가할 수 없게하는 제도를 만들기는 했다.

 최저연봉은 없지만 보유권 제도는 있었다. 기업팀은 사정이 좋다고 5년, 비기업팀은 사정이 나쁘니까 1년의 25%를 프로리그 엔트리에 든 상태로 4년을 뛰면 FA로 풀어줬는데 선수에게 팀 선택권은 없고 최고가를 지른 팀에게 가고 영입한 팀은 보상금과 보상선수까지 지급해야 하는 미친 규정이었다. 선수 입장에선 유명무실했지만 팀에겐 유형무형의 큰 도움이 됐으리라고 믿는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롤 게이머들이 계약 끝나면 엑소더스라도 할 수 있는 건 달착륙 이래 가장 큰 진보아닌가. 심지어 지금은 롤이 공공재니까 저작권 협상 없이 리그 진행하겠다고 하지도 않는다. 가장 심각한 비관주의자라도 협회장이 바뀌고 케스파가 많이 좋아진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엑소더스 혹은 해외런

 스타2를 기점으로 많은 한국 프로게이머들이 경쟁이 치열한 한국보단 사정이 나은 외국으로 나가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언어부터 거주 문제까지 수많은 장벽이 있었지만 점점 많은 선수들이 해외팀에 입단하며 경험이 쌓였는지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이다. 이제는 하도 많아서 누가 어디 가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부 선수들은 먹튀를 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뭐 그렇게 치면 한국도 이스트로, 온게임넷, 위메이드, MBC게임, 화승, 웅진 다 순식간에 날아갔는데 남 이야기할 처지가 아닌 것 같다.

 롤에서도 로코도코같은 1세대 선수들이 단체 이주에 도전한 것을 시작으로 많이들 나가고 있다. 코치들의 수요도 많은 모양이다. 당연히 한국보다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니 나가는 거겠고. 브라질같이 막 리그가 자리잡은 지역에도 선수들이 진출하고 있다.

 특히 중국같은 경우엔 인터넷 방송 BJ가 높은 수익을 거두고 있고, 프로게이머 업계의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심해서 힘들고 욕 많이 먹지만 돈은 별로 못 버는 프로에 굳이 목 메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고용불안정과 박봉에 시달리던 한국 프로게이머들이 진출하기 쉬운 환경이다. 먼저 진출해 팀을 롤드컵 4강에 올려놓은 인섹과 제로를 보면 팀원들에 비해서 훨씬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번 카카오-루키 동반 탈출은 그 확신에 방점을 찍었다. 중국이 많이 주는건지, 한국이 우승팀 선수에게도 대우가 박한건지 알 수는 없다만 아무튼 프로가 몸값 많이 주는데 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같은 거 같다.

중국과 우리는 내국인이 입바른 소리하면 색출해 묻어버리는 문화적 공통점도 가지고 있어서
적응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사진은 찍혀서 영구제명된 로얄클럽의 타베.
 중국 시장이 거대한 만큼 프로게이머나 코칭스태프만 수출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한국의 유명한 대리랭겜 BJ도 중국에 초청되서 통역까지 지원받아 스트리밍하면서 한달도 안되서 1억을 넘게 벌었다. 중국서버 랭킹 1위에 도전하는 이벤트에 성공해 가능했던 거지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국제대회 우승을 해야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큰 시장에서 제 대우를 받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케스파에서 아주부TV와 계약을 맺고 한국 선수들의 스트리밍을 방송하고 있긴 하나, 한국 팀이 선수가 충분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스트리밍 시간을 보장하거나 수익 수단을 마련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심각하게 희망적인 상상같다. 케스파 측에서 여러 액션을 취하고는 있지만 라이엇이 LCS처럼 선수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는 한 가장 큰 돈줄은 구단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해외 진출이 롤챔스의 질을 떨어뜨릴 거라는 의견엔 동의한다. 잘하는 선수들이 나가는데 그 자리를 바로 메꾸긴 힘들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지역 리그의 상향평준화엔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또 전통적 닭장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롤챔스가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리그에서 밀려날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지만, 세계 최고의 리그가 아니게 되어도 사실 아무 문제가 아니다.

 4) 결론

 물론 케스파는 과거와 다르고, 롤드컵 시드권은 라이엇이 쥐고 있다. 무엇보다 롤챔스가 오픈 리그를 지향하고 있는 한 구단들이 과거처럼 리그를 볼모잡아 온갖 횡포를 부리기는 힘들 것이다. 군대 문제가 있는 한 어차피 오래할 수 있는 직업도 아니니 꿀은 빨 수 있을 때 빨아야 한다.

열정 페이 계산법. 출처 <칼방귀 2012년 여름호>
 외국인 제한 때문에 롤드컵 가능성 있는 해외팀에 갈 자리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팀게임이니만큼 언어 문제도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 해외로 나갔을 때의 장점도 많이 보인다. 난 한국 e스포츠 판이 정말 저게 한계라서 선수들에게 저 정도 대우밖에 못해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저 선수들 등골 안치면 유지가 안되는 판이라는 건 쭉 봐와서 아주 잘 알겠다. 프로스포츠니까 힘든게 당연하고 뭐가 어떻고 그런 말을 하기 전에 기본 토양 자체가 저렇게 허접한데 딱히 뭐라고 붙일 말 자체가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