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컵밥과 영세식당

 어렸을 때 못사는 동네에 살았으니 영세하지 않은 식당이 없었고 어렵지 않은 노점상도 없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이라 세 식구가 살면서 7천원하던 치킨 한 마리를 시켜먹기 부담스러웠다. 반 마리를 시키면 배달을 안해주니 엄마랑 15분을 걸어 가지러 갔던 기억도 나는데 나중에 집이 닭집을 했을 때 어지간하면 반 마리도 배달해주던 건 그때와 무관하진 않은 것 같다.

 처음으로 내가 공권력과 노점상에 대해 인식하게 된 건 그 나이 즈음이었다. 엄마가 근처 주공아파트 상가로 장 보러다니는 걸 졸졸 따라다니는 길에, 한 아주머니랑 내 나이 또래나 되보이는 아들 둘이 작은 트럭을 타고 다니며 천원짜리 호두과자를 팔고 있었다. 종종 엄마를 졸랐고 가끔씩은 한 봉지를 들고 집에 왔다. 어느날은 호두과자를 봉지에 담는 중 놀랐던 일이 있었다. 순찰차가 저 멀리 보이자 세 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트럭의 안이 보이지 않게 호루를 다 내리고 운전석으로 가서 숨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경찰이 단속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로 동네를 돌며 순두부랑 오뎅을 팔던 사람이나 채소장사를 하던 트럭만 봐도 저 사람도 잡혀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경찰도 불법 유턴, 신호 위반 다 하던데 저 정도는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다반사겠지만 하얗게 질린 세 모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노점상의 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은 오랜 후의 일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학교 병원이 완공되었고, 자연스레 사람은 많아지고 가뜩이나 좁아터진 보도에 분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으니 사람들이 보도로 걷지 못하고 차도로 내려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옆 재래시장도 한참 재개발 삽을 뜨기 시작할 때라 온 동네가 아우성이었다. 전노련이니 전철연이니 하는 단체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달랐지만 옳고 그름은 없었다. 똑같이 도로 점유하고 불법 영업해도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한 사람 자리엔 단속반이 얼씬도 안한다는 이야기도 파다했다. 그렇다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노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믿는 힘이 있고 빽이 있었다. 그런 폭력적인 도움도 받지못한 사람들은 밀려난지 오래였다. 시각을 바꿔 영세상인 대 노점상의 구도로 본다면 비싼 임대료 다 내고 세금내는(소득 탈루야 다 할 것 같지만) 영세상인의 의견에 귀가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노량진 컵밥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철거건 뿐만 아니라 노점상에서 컵밥 파는 거에 대해 영세상인들이 항의해서 컵밥을 팔지 못하게 되었다고 시끄러웠을때도 그게 진실은 아니었다. 아침 먹으러 고시식당 들어가는 길 노점에서 매번 컵밥을 팔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맥도날드 앞에 무한정 노점이 들어서지 않는 것도 나름의 노점 질서가 있어서일텐데 그 질서를 인정해줘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1년의 유예기간까지 주었다고 하는데 최소 권리금이라도 걸리지 않았다면 어지간했으면 기실 다 나갔을 일이다. 안타까울지는 모르지만 그 불법적인 권리금을 세금으로 보전해줄수는 없지 않은가? 노점상을 무슨 브랜드화 해서 세금 내고 규정 지키며 장사하게 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사업자들을 선정할지도 문제고 그럼 그 사람들이 계약기간 끝나면 지금처럼 안하냐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반론이 다양할 수 밖에 없고 인근 자영업자들에겐 날벼락이 따로 없는 얘기다. 뭐 사육신 공원 쪽에 집단 노점을 만들어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황금상권에서 장사하다 멀리로 옮겨갈 것 같지도 않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맥도날드 안쪽 골목 노점상만 다 철거하고, 대로변 노점상은 아직 건드리지 않았다니 문제는 그런 형평성에 있다면 모를까, 이른바 역세권 보도에 버젓히 부스까지 만들어 장사하는 노점상들을 두고 생존권을 이유로 두둔하는 것은 침소봉대다. 물론 타협과 설득을 통해 더 나은 방안을 찾을 수도 있겠고 그 방안이 더 유의미할 순 있겠지만 모두를 위한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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