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차라리 괴력난신을 논하라

 문자로 된 기록이 보편적이지 않은 시대에도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은원이 얽히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일의 해석엔 '도리'와 '목숨'이 보충적 효력을 가졌다. 모두가 시퍼런 칼을 든 권력자에게 대들어 억울하거나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복수를 해줄 수는 없으니 대신 넋이라도 달래주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야사나 설화를 짓는 것이 그런 방법 중 하나였다. 야사나 설화를 모아놓은 책을 보면 대개 한 페이지 걸러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한을 풀어달라고 나오고, 숙청을 마친 권력자가 병에 걸려 무슨 신령한 귀신의 힘을 빌어 고치는 것도 자주 나온다. 그런데 나라 팔아 호의호식한 자나 부모를 해친 자는 어떻게 죽었든간에 프레디나 제이슨이 되어 무덤파고 기어나오진 않았으니 그런 이야기들은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주인공을 선정했는지 알 만 하다.

 공자는 괴력난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지만 이런 교차검증따윈 불가능한 초자연적 이야기들도 글을 배운 식자가 적거나 모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전설화로 남거나 아예 무속의 영역으로 남았을텐데 분명 당대든 후대든 기록으로 편집해 남아있는 경우도 많고, 황희같은 사람은 숫제 뜻있는 선비가 산야에 있으면서 들은 바를 곁에서 기록한 거라고 야사의 정의까지 내리기도 했다. 반유교적 괴력난신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정보는 취약하지만 나름대로 충효론과 생명중시 사상에 충실한 저술이니 선비가 하면 안되는 일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씹선비라는 비하적 표현도 인터넷에 넘쳐나지만 자칭 선비 정신을 본받는다며 고문깨나 아는 걸 자랑으로 삼고, 품위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나 고문을 많이 아니 역사도 두루 아리라 여겨진다. 그런 정체 모를 품위 지키는 꿀먹은 병아리보단 명예를 지킬 줄 아는 거친 사람을 더 좋아한다만 물어나 보고 싶다. 신릉군은 숨어사는 모공, 설공을 초빙하기 위해 평민으로 가장해 저잣거리 술집에서 함께 어울렸고, 평원군은 그 모습을 부끄러워하다 자기 식객 반을 신릉군에게 빼앗겼다.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품위있어 보이는지가 중요한가, 방향의 옳음이 더 중요한가? 평생 봐온 것만 보고 사는 저런 작자들의 언행이란 졸렬하기 그지없다. 시비를 가리기 전에 이미 손 들어주는 방향은 정해져있으니 자기 옷이 더럽혀질라 한발 물러서 옛날 고사 한번 인용하고 양비론으로 몰아 '요즘 세태가 아쉽다'며 혀나 끌끌 차기 바쁘다. 뜻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라 소인이나 할 법한 일이다. 거악에는 매번 눈을 감고, 소악에는 매번 거품을 무는데 거악의 '붕당'이 아니라면 매번 그럴 이유가 있는가? 그 악함의 한결같음은 한겨울에도 푸른 석파정 천세송같다. 약자의 생존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선비라니 가당찮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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