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의리론의 부질없음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 영웅본색의 간지나는 대사다. 저건 영화의 극적 요소일뿐이고 애초에 세상에 그 의리라는게 지켜지던 때는 어느 기록을 봐도 없는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도 약속을 안지켜서 영구임대 주택에서 강제퇴거당했고, 요순시대 정도면 각종 판타지 역사서 포함해도 상고시대인데 저기 나오는 요-순-우 임금도 서로 찬탈을 해놓고 순양이라 우겼다는 설은 기원전부터 있었으니 배신은 인류의 오래된 유산임이 확실하다.

 사람들이 어떨때 그 의리라는 걸 지키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황은 이득을 앞에 두었을 때다. 가끔 만화를 보면 베지터같이 강자와 싸우고 싶었다며 손오공 후려치는 놈들도 나오지만 차라리 손권처럼 멍청하고 졸렬해서 앞뒤 구분 못하고 칼 꽂는 놈들이 많으면 많지, 저런 케이스는 거의 없다. 과거에는 웃전의 이득을 빼앗는 과정은 찬탈이라 부르고, 획득한 이득을 어제의 동지와 나누기 싫어하는 상황은 숙청이라 불렀지만 동기 과정 결과가 모두 같으니 그냥 배신이 때와 장소에 따라 많은 이름을 가지는 것 뿐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배신은 암묵적 면죄부를 받기도 한다. '조직의 논리'가 개입됐을 때가 그 중 하나다.

 내가 본 운동 선수 중에 가장 의리 좋아했던 사람이 허재다. 여기서 의리는 물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라기보단 (그랬으면 음주운전은 하지도 않았겠지) 끈끈한 동료애에 기반한 연대의식에 가까울 것이지만 대학 진학할 때도 의리, 실업팀 입단할 때도 의리, 트레이드 시켜달라 할 때도 태업을 하는 게 아니라 할 건 다 하고 요구하겠다고 부러진 손등으로 준우승 챔결 MVP 받고 갔으니 팀에 대한 의리를 다하긴 했다. 방열 감독 항명사건은 뭐냐 반문할수도 있겠지만 허재의 입김보단 다른 이유가 더 커 보인다. 이충희 해설위원과 척을 진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고 김현준 코치 장례식 문제였다고 한다.

 그렇게 의리 좋아하던 허재가, 신선우 감독이 LG로 떠나 김재박 감독과 평행이론 쓰기 시작해 공석이 된 KCC 감독으로 부임해 한 일들은 그 좋아하던 의리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조성원이 무릎 부상을 이유로 조용히 은퇴해서 이-조-추가 해체된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사건의 경과는 1) FA로 서장훈, 임재현을 데려왔다 2) 연봉 랭킹이 낮은 임재현의 전 소속팀 SK에는 보상선수를 줄 필요가 없었으나 서장훈이 있던 삼성에는 보상선수를 줘야했다 3) 자동으로 이적생 서장훈, 임재현은 보호선수 3인에 들어가고 이상민과 추승균 중 한명을 묶을 수 있었다 4) 추승균을 보호하고 이상민은 바이바이 5) 삼성이 이상민 데려가긴 부담되니 차라리 1라운드 픽을 달라고 한 제안도 거절

 이상민이 나이탓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건 사실이었지만 팔순 노인네는 아니고 2,3년은 거뜬해보였고, 그야말로 현대-KCC 꼬인 족보의 적통을 잇는 상징이자 최고의 슈퍼스타 겸 미래의 감독을 짬시켜버렸으니 난리가 났다. 이상민의 위상도 위상이고 그 시절 초보 감독 허재가 작전타임 중에 이상민의 지도(?)를 받는 모습이 자주 중계되었고 드래프트 모교 사랑도 시작된 시점이라 흔히 있는 노장선수 팽이 아닌 팀내 파워게임 아니냐 시각도 있었다. 진위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일리있는 주장이다. 뒷 얘기로 허재가 한 기자와 가진 사석에서 이상민만 팬 많냐 나도 많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카더라도 들려왔는데 성격상 그럴싸해 보이지만 컨펌되지 않은 야사 수준으로 넘기자.

 이적해온 서장훈 입장에서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올 때는 대학선배 이상민과 오랜만에 함께 뛰며 선수생활 마무리하겠다고 왔는데,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가니 가뜩이나 답답한 와중에 이응사 막강화력이 자기한테도 튀어서 입단식도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삼성에 FA 이적을 했을때도 팀이 샐러리캡 맞춘다고 선배 우지원을 보냈으니 트라우마까진 아니더라도 멘붕될 법도 했다. 여차저차 시즌이 시작되고 KCC는 전년도 꼴찌에서 벗어나 플레이오프에 나가긴 했는데 하필 이상민의 삼성을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업셋을 당하니 이응사의 한도 조금은 풀렸나 싶었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상민을 보낸 대가로 지킨 픽으로 2008년 드래프트에서 하승진을 뽑게 되는데, 자연스레 서장훈과 하승진의 출전시간, 포제션 문제가 불거졌고 일관성있게도 나이 많은 서장훈이 전자랜드로 트레이드 되게 된다. 2:3 트레이드였지만 당시 서장훈을 보내고 강병현을 받는 형국이었고 전자랜드 최희암 감독은 아주 좋아서 어음(유망주 강병현)을 보내고 현금(서장훈)을 받는다고 했는데, 꼬인 사람들은 중대 선수는 중대 출신 감독에게 보내고 연대 선수는 연대 출신 감독이 받는다 그렇게 해석하기도 했다. 사족으로 KCC는 플레이오프에서 서장훈의 전자랜드, 이상민의 삼성을 연파하고 챔피언에 오르며 강팀으로 거듭났고 이후 전태풍까지 뽑으며 허재는 명장 소리는 못들을지라도 복장 소리는 항상 듣게 된다,

 두 말 할 거 없이 이상민과 서장훈을 내친 이유는 허재의 성격이 변해서가 아니라 조직 논리 때문이다. 과거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제는 적장인 전창진, 강동희 감독과도 가끔 일이 있을 뿐이지 잘 지내는 허재다. 토쟁이들 말이긴 해도 서로 가끔 덕 본다는 말도 나온다. 다만 이상민, 서장훈은 성적과 세대교체라는 조직의 명분이 있으니 내칠 수가 있었고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틀어진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허재가 그린 팀의 미래에 저 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이상민이 삼성에서 은퇴하면서 영구결번을 받고, 그토록 오래 함께했던 KCC측의 영구결번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은 걸로 마무리 되었다. 씁쓸하지만 비슷한 일들은 엄청나게 많다. 한번 미래 계획 구상에서 빠진 조직원에게 따스한 조직은 드물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내부 결속 측면에서라도 웃긴 일도 서슴치 않고 벌인다. 그런 일들은 종목을 불문한 만국 공통인가 한국이나 일본이나 야구계에서 방침에서 어긋난 선수들 대하는 태도는 둘다 똑같았다. 고작(?) 대리인을 데리고 오면 연봉을 깎겠다 일갈한 요미우리 회장보다도 오히려 한국쪽이 더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고위층이 선수협에 무슨 말을 했었고, 이후에는 어떻게 표리부동했는지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인게 한 말과 행동만 쭉 적어도 고인드립감이니 적지는 않겠다.

 한 팀은 선수협 파동 때도 의리를 지켰어요 그런 말도 있는데 그건 팀에서는 뻘짓 하려는 거 오너가 철회시킨 일회성 이벤트다. 불과 몇년후에 현금받고 다른 팀에 내준 선수 이사비 50만원 주기 싫어서 야구규약까지 어겨가며 땡깡 부리다 망신당하는가 하면, 사인 앤 트레이드로 필요한 선수는 받아도 다른 팀에 그렇게 보내지는 않으니 그게 의리를 지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권력이 없어 자금줄 눈치를 봐야하는 폐쇄된 조직이라면 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과잉충성이니 자정기능 상실이니 말이 나올지 몰라도 중간관리자들은 목이 달려있으니 안 그럴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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